[창간특집] 60세 교수 코로나 확진자의 충격 고백 “음압병실서 보낸 고통과 두려움의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창간특집] 60세 교수 코로나 확진자의 충격 고백 “음압병실서 보낸 고통과 두려움의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05.14 14:02
  • 호수 7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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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오현주기자] UN 인권전문가로 활동하는 서창록(60·사진)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2020년 3월 어느 날, ‘성북구 13번 확진자’가 됐다. 서 교수의 기억에 의하면 뉴욕의 마트 주차장에서 접촉한 동유럽 청년으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된 것 같다. 서 교수는 완치 후 음압병실의 고통스런 투병 과정, 인권 전문가로서 겪은 모욕과 좌절, 새롭게 느끼는 가족의 사랑 등을 진솔하게 담은 책 ‘나는 감염되었다’(문학동네)를 펴냈다. 책의 중요 내용을 발췌해 싣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뉴욕의 마트 주차장에서 접촉사고 낸 동유럽 출신 청년에게 감염된 듯 

작년 3월만 해도 실험용 쥐처럼 효능 없는 에이즈·말라리아 치료제 복용 

나는 UN에서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으로 6년간 일해오던 중에 2020년 3월 UN체제학회 참여 차 뉴욕으로 출국했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나는 오랫동안 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인권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면서 공동체를 중시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내가 잠시나마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고 보니 나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3월 17일, 나는 코로나19 감염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감염됐을까. 나는 나름대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역학조사를 해보았다. 지인들 중에는 감염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의심 가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마트에서 만났던 동유럽 출신의 청년이다. 그의 승용차가 후진해 내 차 오른쪽 옆구리를 들이박는 접촉사고가 났다. 그와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그로부터 코로나에 감염돼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보는 매우 굵고 큰 가래 

당시 미국에서는 방역수칙이 따로 없었고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 확진 받으면 더 대책이 없을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는 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고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공항에서 바로 강북삼성병원으로 가는 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병원 밖에 만들어놓은 임시 천막은 상당히 열악했다. 검사비를 결제하고 설명을 들은 후 조그만 방으로 이동했다. 좁은 방에 들어가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스스로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흐르고 점점 더 한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기침이 나면서 여태 살면서 보지 못했던 매우 크고 굵은 가래가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사가 검사 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그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가래를 보여주었더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가 검사 장비를 꺼내 예고도 없이 코 안에 검사 도구를 넣고 가차 없이 후비기 시작했다. 코로나 진단을 위한 핵산검사였다. 해열제, 항생제, 소화제, 항바이러스제, 기침약 등을 받아들고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전화로 친절한 목소리의 여성이 나지막한 소리로 “어제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판정이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양성 통보 후 4시간 만에 앰뷸런스가 와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갈 때까지 한 행동에 대해선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 마치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나는 것과 같다. 다만 몇 군데서 전화가 왔다. 내가 공항에서 어디에 들렀고 누구를 만났는지 물었고 내 신용카드 번호를 달라고 했다. 당국에서 핸드폰과 신용카드 사용기록을 추적해 나의 동선을 파악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사진을 하나 내달라고 했다. ‘그게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자 CCTV를 통해 내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서란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내말을 못 믿는다는 말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많은 개인정보를 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런 대응이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너무나 두려웠고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불손하게 대응했다가 병원에도 못가면 어쩌나 위축됐기 때문이다. 소위 인권전문가라는 사람도 이런 공포감이 먼저 드는데 일반인은 이런 상황에서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 정보 수집에 동의하는 절차는 아무 의미 없는 요식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자고 싸는 게 가장 중요

병원에 도착하니 방호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엑스레이와 CT촬영을 했다. 폐렴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검사를 끝내고 음압병실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갔다. 내부에 있는 감염성 바이러스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병실이다. 창문을 열 수가 없었고 입구도 이중문으로 돼 있었다. 바깥은 쳐다보기도 어렵다. 음압기 소리가 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낸다. 첫날밤엔 가슴이 조여오고 숨이 막혔다. CT사진에서 약간의 폐렴이 보이지만 엑스레이에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경미하다고 했다. 

식사는 이틀 동안 거의 하지 못했다. 입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몸도 아픈데 후각과 미각이 사라져 맛도 느끼지 못하고 음식 자체를 목에 넘기기도 어렵다. 아무런 냄새도 못 맡는데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온다.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이것을 통해 수액을 맞고 피검사를 위해 혈액을 뽑고 주사도 놓는다. 방호복 차림의 간호사는 위생용 장갑을 끼고 그 위로 다시 비닐장갑을 낀 채 주삿바늘을 잡은 것이 무척 힘들어보였다. 고글 사이로 땀방울이 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바이러스가 몸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칼레트라’라는 에이즈 치료제를 처방해주었다. 복통이 시작되고 설사를 심하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치료제는 코로나에 거의 효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누구도 모르는 병이기에 이것저것을 투약해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라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사용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 이 치료제로 바꾼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실험용 쥐 모르모트 신세가 된 것이다.

아파보니까 먹고 자고 싸고 이 세 가지가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 가지 이외의 것은 다 덤일 뿐이지 필수적이지 않다. 적어도 이 세 가지를 편안히 할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하는 일이 바로 인권운동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리라 다짐했다.

24시간 감시 당하는 음압병실  

며칠 동안 어지럽고 힘도 없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다. 다행히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의사는 잘 회복되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체중은 좀 줄었지만 이제는 음식도 잘 들어가고 대변도 정상이 됐다. 산소포화도 모두 정상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회복기에 들어선 나를 제일 괴롭힌 건 무엇보다도 몸살 기운이었다. 다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도 수시로 몸살이 심하게 왔다. 어지럼증도 같이 온다. 간호사에게 약을 부탁했지만 열이 없는 상태에서 약을 먹으면 열이 나는지 확인할 수 없다며 주지 않았다. 내 가방 속의 타이레놀이 생각나 꺼내서 먹으려고 했다. 그 순간 “환자님 그 약 드시면 안돼요” 라고 확성기가 켜지며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감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 후 오전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전화로 상담을 진행한다. 코로나 환자들 가운데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메르스 시절에 이런 방식이 도입됐고 환자들에게 꽤 도움이 돼 계속한다고 했다. 의사는 ‘가슴 답답함과 어지럼증이 코로나 때문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이 많아 정신 상태를 계속 모니터링한다’고 했다. 그는 매우 친절하고 꼼꼼하게 상담해주었다. 그 정신의학과 선생이 한없이 고마웠고 그의 도움 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병원에서 정신질환이 생겼고 약을 처방 받아 복용했다. 실제로 완치된 이들 가운데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하지만 바깥에선 정신병 얘기는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두려운 것이다.

퇴원 날, 온몸을 락스로 완전 소독

매일 실시하는 유전자 검사에서 48시간 연속 음성 판정이 나왔다. 입원한지 3주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하는 날, 온몸을 락스로 완전히 소독한 후에 샤워를 하고 폐 CT를 찍었다. 별 이상이 없었다.

코로나 감염 이전과 이후의 내 생각은 분명 많이 달라졌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겠다는 생각, 남을 더 배려하고 무엇이든 너무 욕심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저 6개월 후에 사라질 착하게 살겠다는 추상적인 결심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코로나 19로 인해 배운 것은 삶에 대한 의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에게 삶의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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