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기고] “유행가 부르게 한 선생님, 사랑합니다”
[백세시대 / 기고] “유행가 부르게 한 선생님, 사랑합니다”
  • 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 승인 2021.05.28 14:15
  • 호수 7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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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나에게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6세이다. 지리과목을 가르친 고3때 담임선생님. 지리부도 한 권만 덜렁덜렁 들고 와 지구촌 각 나라의 각종 제원(諸元)을 줄줄 판서하시던 명석한 선생님.  

선생님은 날마다 종례시간에 단체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것도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로 시작하는 가수 백년설의 ‘나그네설움’같은 유행가를.  다른 반 친구들이 노래 소리에 놀라 창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왜 이 유행가를 고3 제자들에게 1년간 종례 때마다 부르게 했을까? 

그 선생님을 해마다 ‘스승의 날’만 돌아오면 모시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지난해에는 철썩 같이 약속했지만 제주도 가족여행 중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않아 못 오셨고, 올해는 코로나증상 기운이 있으니 의사가 집밖 출입을 삼가라 했다고 한다. 당신은 살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괜찮지만 혹시라도 제자에게 감염 등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하여 약속이 아쉽게 불발됐다. 

10여년 전 전주 한옥마을 근처 어느 음식점에서 제자 10여명이 선생님을 모셨다. 어둑해질 무렵, 골목길에서 부른 ‘나그네설움’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술 한 잔에 취하신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만주일대에서 불렸다는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하는 ‘독립군가’를 부르셔서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고교 시절 전주에 오신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을 듣고 ‘어찌 동포끼리 남북으로 대립, 총을 겨눌 수 있냐’는 생각으로 군 입대를 거부해 교사생활 내내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고도 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선생님의 불민한 제자로 명색이 ‘인문학 강사’를 5년째 하면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여러 번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 아닌가. 금방 이렇게 멀쩡하다가도 5분 후 졸지에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이 여러 번 된다는 것도 사실은 순간(瞬間)이자 찰나(刹那)일 것이다. 어느 순간에, 어느 선배나 선생님을, 어느 책이나 그 속의 어느 내용을, 어느 사건이나 현상을 어떤 계기로 만난 후 자기 인생을 통틀어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바뀐 사례가 수없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오늘 제 강의 중 어느 대목에서 번개 같은 영감(靈感)을 얻고 생각의 전환이나 행동의 실천이 잇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늘 열정적으로 강의를 한다.”

일제 강점기 이승훈 선생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게 인생(人生)인 것을. 우리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늘 학생(學生)이어야 한다. 학생만큼 좋은 게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며 명명백백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엄벙한 학생들을 일깨워주는 선생님이 소중한 까닭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내년 스승의 날에는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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