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기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고 보니
[백세시대 / 기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고 보니
  • 이철규 백세시대 명예기자
  • 승인 2021.09.17 14:11
  • 호수 7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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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규 백세시대 명예기자
이철규 백세시대 명예기자

물길처럼 걸어온 길, 어느덧 팔십이란 나이를 먹었다. 참 사연도 많았다. 힘들었던 기억은 생생하고 즐거운 추억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며 살라던 부모님 말씀 명심하며 살아온 세월이 인생 끝자락에 와 있다. 

넉넉지는 못해도 농사로 자급하고 텃밭에 닭 십여 마리 기르며 건강하게 살아왔다. 건강하다고는 하지만 팔순이 되다보니 신체의 쇠퇴가 피부로 느껴진다. 

어느 날 오후 닭장에 들어갔다 나오다 머리를 문틀에 세게 부딪쳤는데 출혈도 조금 있었다. 당시는 많이 아팠으나 좀 문지르고 시간이 지나니 통증도 사라지고 괜찮아졌다. 다음날 오후 취미생활로 10여년 다닌 전천후게이트볼장에서 회원들과 시합을 하며 즐기는 도중 필자가 멋있게 타격을 해야 할 차례가 됐다. 

공 앞으로 가 왼손으로 공을 잡아 스파크 타격을 해야 한다. 상대방 공 앞에까지는 갔는데 상대방 공을 잡는다는 게 내공을 잡고 멍해졌다. 반칙을 한 것이다. 불과 몇 초만일까, 정신을 잃은 거였다. 회원들이 옆에서 소리 지르며 “왜 그러냐”고 한다. 

쓰러지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건지소가 있어 그곳에 가 보건소 소장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소견서를 작성해 줄 테니 의료원에서 MRI 촬영을 해보라” 한다. 

당일은 못가고 다음날 의료원에서 MRI 촬영을 하고 바로 판독한 결과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의아하기는 하나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일상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후 가끔씩 ‘이러다 쓰러져 식물인간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오래 전 장모님이 의식 없이 살아계실 때 어쩔 줄을 몰라 연명치료를 하다 애처롭게 떠나가신 것이 불현듯 생각나기도 했다. 

언젠가 ‘본인이 연명치료를 안한다고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적이 있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단 출장소가 있어 차일피일 미룰 것도 없이 그 길로 달려갔다. 공단 직원에게 이야기하니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사전의향서 작성도 도와줘, 어렵지 않게 서류를 작성해 제출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후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카드’가 우편으로 왔다. 사전의향서 등록증이다. “귀하께서 작성하신 사전의향서가 국립연명 의료기관에 등록되었습니다”라고 찍혀 있고 상단에는 큰 글씨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제는 장기기증 신청도 하고 여생 동안 건강 지키며 후회도 미련도 없이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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