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유권무죄(有權無罪)
[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유권무죄(有權無罪)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10.08 14:17
  • 호수 7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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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88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서는 대한민국 범죄사에 기록된 권총 인질극이 벌어졌다. 당시 인질극의 주범 지강헌은 경찰과 대치 와중에 이러한 말을 내뱉었다. 지강헌은 상습적으로 강·절도를 저질러 온 범죄자였지만 ‘5공 비리’로 불리는 전두환 일가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대변하며 큰 공감을 샀다.

그리고 지난 9월 30일 방영된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2’에서 이 말이 다시 소환된다. 해당 방송에서는 2009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소개했다. 당시 4명이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를 마시고 A씨를 포함한 두 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수사 끝에 밝혀진 용의자는 A씨의 남편과 그의 딸이었다. 용의자로 지목된 두 사람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A씨에게 들통나 이를 숨기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수사팀의 주장이었다. 1심에서 부녀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후 결과가 뒤집혀 A씨 남편은 무기징역, 딸은 20년형을 선고받고 현재까지 수감 중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당시 수사 과정에서 수상한 행보를 조목조목 살폈다. 딸은 경계성 지적장애 가 있고 남편은 한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변호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제작팀은 취재과정에서 찾아낸 이러한 의혹을 당시 검찰 수사관에게 물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횡설수설하며 내뱉은 이 말은 시청자들에게 당시 수사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의혹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2021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전무죄일까. 10월 1일 시작된 국정감사에서 대기업 수장들이 불려나와 굽실거리는 걸 보면 그 힘은 옅어진 것 같다. 비록 ‘유전’의 힘은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유권(력)’의 힘은 막강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헌법기관’이라는 걸 강조하며 ‘기업인 때리기’에 나섰다. 이런 의원들 틈에는 “자식에게 문제 있는 공직자는 공직자의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모 의원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은 국정감사가 열리기 며칠 전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적발됐다. 이 과정에서 측정을 거부하고 경찰을 밀치며 국민이 준 신성한 공권력을 무시했다. ‘무면허’인 이유는 이미 한 차례 음주로 적발돼 실형을 선고받고 면허가 박탈됐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라는 것이다. 

음주 사실을 부인해 결국 경찰이 인력을 낭비해가며 그의 음주 기록이 담긴 CCTV까지 확보해야 했다. ‘증거인멸’이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10월 7일 현재 영장은 청구되지 않았다.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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