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기고] 오늘을 감사하며
[백세시대 / 기고] 오늘을 감사하며
  • 임종선 수필가
  • 승인 2021.10.15 14:24
  • 호수 7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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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선 수필가
임종선 수필가

밝고 생동감 있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약속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다. 인간이 환경의 지배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시대와 세대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는 이겨낼 도리가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필자는 간암과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보행이 힘든 아내의 간병을 하고 있다. 매 끼니를 챙겨주고 병원에 함께 가는 등 미수(米壽)의 나이에는 버거운 오늘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40여년 전 직장에서 퇴직 후, 친구와 함께 당시 유명하다는 사주쟁이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는 필자에게 79세수(歲數)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70세가 넘은 뒤에 간질환을 앓고 건강이 좋지 않았졌을 때 사주를 본다는 고향 후배를 찾았다. 후배는 “임 형! 건강관리만 잘하면 80세 이후에도 건강하겠네”라고 말해줬고 노욕이 있어서였는지 그때는 반가웠다.

하지만 막상 팔순 넘어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암담했다. 필자와 아내 모두 투병 생활을 하는 절망적인 현실에 처하다 보니 생에 대한 의욕을 점차 상실하고 나약해지고 있다. 필자를 보다 괴롭게 하는 건 아내의 투병이 아닌 투정이다.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되레 힘들게 차려 준 밥상 앞에서 입맛이 없다며 신경질을 내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얄미운 정만 쌓이고 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때마다 어떻게 알고 휴대폰을 통해 전해지는 “삶에 감사하라”, “부부가 함께 있음을 감사해라”, “오늘을 항상 감사하게 살라”는 격려문자에 위안을 받는다. ‘아내가 나보다도 더 괴롭고 통증이 심하니까 투정을 부리는 것이겠지’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까이 사는 자식들이 매일 반찬 등을 가져다주는 것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다.

전날 쌓인 아내의 불만은 아침마다 하는 산책에서 눈녹듯이 녹아내린다.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걷는 아내를 부축하며 아파트 담장 옆길을 걷을 때마다 아내의 손을 꼭 쥔다.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새색시 손은 어느덧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필자에게 시집와 네 자식을 낳아 기르고 4대 종손(宗孫)의 종부(宗婦)로서 조상님의 제사를 정성껏 모신 한 여인의 굴곡지고 주름진 삶이 보인다. 그러다보면 알게 된다. 아내는 필자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평생 헌신한 고마운 은인이었다는 것을. 내 건강보다도 아내의 건강관리에 여생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야겠다 다짐한다.

버겁고 고달프지만 오늘을 감사하고 더욱 행복하게 보내야겠다 재차 다짐하면서 저녁상에 올릴 쌀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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