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 미공개 작품 포함 박수근의 예술 세계 집대성
‘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 미공개 작품 포함 박수근의 예술 세계 집대성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11.19 15:02
  • 호수 7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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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첫 공개되는 박수근 화백의 1962년 작 ‘노인들의 대화’
이번 전시에서 첫 공개되는 박수근 화백의 1962년 작 ‘노인들의 대화’

첫 공개하는 ‘노인들의 대화’ 등 170여점… 10대 시절 그린 수채화도 전시

도난 후 다시 그린 ‘나무와 두 여인’, 창신동 담은 ‘판잣집’ 등 눈여겨볼만

[백세시대=배성호기자] ‘45억2000만원.’

지난 2007년 5월 국내 미술품 대표 경매업체인 서울옥션이 발칵 뒤집힌다. 박수근 화백(1914~1965)의 ‘빨래터’(1950)가 출품돼 당시 한국미술 최고가에 낙찰이 된 것이다. 현재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들에 최고가 자리를 내줬지만 아낙네들이 정겹게 빨래를 하는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아직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작 생전에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대로 된 개인전조차 열지 못했다.

이런 박수근 화백의 미술 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3월 1일까지 진행되는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에서는 유화‧수채화‧드로잉‧삽화 등 170여점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본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후 처음 여는 박수근 개인전으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집해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박수근 작품 33점 중 31점과 그간 공개된 적 없던 ‘노인들의 대화’ 등 유화 7점, 삽화 12점을 처음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첫 박수근 개인전을 열어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전시장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은 첫 박수근 개인전을 열어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전시장의 모습.

먼저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에서는 ‘만종’으로 유명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박수근이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0대 시절의 수채화부터 1950년대 유화까지 그의 초기 작품들을 공개한다. 12세 무렵 책에서 본 밀레의 ‘만종’에 감동한 박수근은 직접 ‘밀레 화집’을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서양화가의 화집도 수집했다. ‘철쭉’(1933), ‘겨울 풍경’(1934) 등 초기작을 보면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삽화나 표지화도 그렸다. 펜화, 판화, 프로타주(물감을 화면에 비벼 문지르는 채색법) 등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도 그를 대변하는 단순성, 흑백 대비와 같은 회화 양식을 다듬어갔다.

이어지는 2부 ‘미군과 전람회’에서는 박수근의 미군 PX 초상화가 시절, 한국전쟁 후 재개된 제2회 국전에서의 특선 수상작부터 그가 참여한 주요 전람회 출품작들을 전시한다. 박 화백은 미군 초상화가의 이야기를 그린 박완서 작가의 데뷔작 ‘나목’의 실제 모델로 유명하다. 전쟁 전 도청 서기와 미술교사를 지냈던 박수근은 전쟁 후에는 미군부대 내 PX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그곳에서 소설가 박완서를 만났다. 미군부대는 박수근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온갖 수모를 견뎌내야 했던 곳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을 아끼는 후원자들을 만나게 해준 곳이기도 했다.

이중 눈여겨볼 작품은 ‘나목’에서도 거론된 ‘나무와 두 여인’(1962)이다. 이 작품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박 화백은 1961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자유미술전’에 ‘나무’를 출품했다가 도난당한다. 이때 그는 “그림을 가져간 사람이 돈은 없지만 작품이 탐이 나서 가져갔을 텐데, 작품이 도둑을 당한다는 것은 영광”이라면서 흐뭇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에 한국에서 열린 ‘국제자유미술전’을 위해 이 작품을 다시 제작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옆에서 아이를 업은 여인과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어딘가 쓸쓸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감정이 느껴진다. 

3부 ‘창신동 사람들’에서는 박 화백이 정착한 창신동을 중심으로 가족, 이웃, 시장의 상인 등 그가 날마다 마주친 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또한 박수근의 그림과 함께 당시 시대상을 담은 한영수의 사진을 함께 전시해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1950~6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을 따스한 시선과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한 예술가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창신동의 모습을 담은 ‘판잣집’이 대표적이다. 작품 속 판잣집은 거센 태풍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허술해보인다. 하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새가 마치 함께 추위를 극복하는 펭귄들을 연상케 해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마지막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박수근이 완성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살핀다. 박 화백은 49세 되던 해 백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다가 51세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가난과 싸운 그가 평생 즐겨 그린 소재는 ‘여성’과 ‘나무’이다. 그의 그림에서 고단한 노동을 하는 여성과 잎사귀를 다 떨군 나목은 ‘추운’ 시대를 맨몸으로 견뎌낸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이는 ‘고목과 여인’(1960년대 전반)에 잘 나타난다. 보통 인물을 먼저 그리고 그 뒤의 배경으로 나무가 서 있는 것과 달리, 커다란 고목을 전면에 대담하게 배치하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인물들을 그렸다. 검게 처리된 고목과 여인들이 입은 저고리의 색채를 대비시키면서, 죽은 나무에서 나는 새싹처럼 엄혹한 현실을 이겨내고 생활을 이어가는 생명력을 강조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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