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63] 절밥과 까마귀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63] 절밥과 까마귀
  •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승인 2021.12.24 13:28
  • 호수 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밥과 까마귀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속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종 울리니 절밥이 다 됐나 보다

까악까악 까마귀들 쪼아대는 걸 보니.

睡起吾閒步 (수기오한보)

山深誰復過 (산심수부과)

峰陰渾欲霧 (봉음혼욕무)

林雪自開花 (임설자개화)

石怪盤松老 (석괴반송로)

菴憐畵佛多 (암련화불다)

鐘鳴齋飯熟 (종명재반숙)

啼啄有寒鴉 (제탁유한아)

- 박태관(朴泰觀, 1678~1719), 『응재유고(凝齋遺稿)』 권상 「관음사에서[觀音寺]」두 번째 수[其二]


이 시를 쓴 분은 박태관(朴泰觀, 1678~1719)입니다. 박태관은 자(字)가 사빈(士賓)이고 호(號)는 응재(凝齋) 또는 백애자(白厓子)며, 본관은 반남(潘南)입니다. 박태관은 백악시단의 일원으로 스승 김창흡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이병연, 정선, 홍세태, 정래교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습니다. 시선집 『응재유고(凝齋遺稿)』가 전하는데 벗이었던 이병연이 자신의 녹봉을 덜어 간행해주었습니다. 박태관은 김창흡으로부터 시가 예스럽고 질박하며 꾸밈이 없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두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인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수를 가져왔습니다. 박태관은 관음사라는 절에 들러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에 홀로 산책에 나섭니다. 수련(제1구와 2구)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또 이 길을 걸었으랴!” 라고 하였듯, 박태관의 산책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새벽 첫눈을 밟는 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련(제3구와 4구)에서 보듯, 산책을 하노라니 안개가 낀 듯 어둑한 산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습니다. 시인은 좀 더 길을 걷습니다. 가다 보니 노송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노송은 하얀 눈을 인 채 차디찬 바위에 기기묘묘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암자에는 벽에 부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얀 눈 속에 무방비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련해라!’ 라고 한 것입니다. 인적 하나 없는 순백의 세상, 그 안에 노송과 부처, 그리고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제7구와 8구)에 있습니다. 순백의 세상, 청정무구의 세계에 빠져 있던 작가에게 홀연 종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겠지요. 종소리를 따라 선문에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너무도 익숙하게 부리로 쪼아대며 울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시인은 아름다운 생각을 피웁니다.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까마귀가 알고서 모여들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이 본 장면은 우연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까마귀들이 종이 울리면 으레 절에 와서 아침밥을 공양받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빼어난 시적 상상입니다. (하략)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