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네’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네’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2.01.28 13:50
  • 호수 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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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코로나19, 네가 출현한지 2년여

너 때문에 외출도 못해 지긋지긋

코로나로 인해 좋은 점 있다지만

내 입과 코 시원하게 드러내놓고

여기저기 막 쏘다니고 싶어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다. 어쩌면 이미 돌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커튼을 열어 밖을 보았다. 오늘따라 그 흔한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이 풍경, 그다지 낯설지 않다. 어젯밤 보았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다. 나만 빼고 밤새 다들 지구를 탈출했나. 어제 본 그 영화가 영화가 아닌 현실? 

앗. 눈 쌓인 산 옆 오솔길을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다. 보행용 유모차를 밀고 할머님 한 분이 힘겨운 듯 느릿느릿 올라온다. 코로나로 문 닫힌 경로당. 답답해서 운동하러 나오셨나 보다. 그렇다면? 나도 나가자.

오랜만의 외출인데 한껏 꾸미고 나가서 콧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며칠 전 홈쇼핑에서 구입한 폭이 좁아서 늘씬하게 보이는 치마와 신는 순간 열 살은 젊어진다는 안쪽에 양털이 빼곡한 신발, 그리고 사돈에게 선물 받은 명품 핸드백까지 챙겨 들고 외출을 나섰다.

도착한 쇼핑몰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행도 못 가고 만남도 못 하다 보니 마치 쇼핑몰이 유명 여행지라도 되는 양 다들 화려한 옷차림으로 뽐내는 중이다. 슬그머니 겁이 나서 마스크를 꺼내 두 개를 겹쳐 쓴 다음 코 부분을 손가락으로 꼭꼭 여미었다. 

사실 딱히 살 것도 없다. ‘쟁여놓으세요’, ‘빨리 주문하세요’, ‘곧 매진이에요’라는 쇼호스트 말에 혹해서 쟁여놓은 돈가스, 갈비탕이 냉장고에 가득가득하고 ‘지금 사시는 게 돈 버는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단순히 돈을 벌려고 내질러 산 옷들이 옷장마다 그득하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씀을 지겹게 안 들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나. 홈쇼핑 쇼호스트 말은 참 잘도 듣는다. 결국 밀폐용기 하나 달랑 사고 사람 구경은 질리도록 했다.  

앗, 스타벅스다. 예전엔 저기서 수다도 많이 떨었었는데. 과거를 생각하며 ‘캐러멜마키아토’ 한잔을 손에 들고 쇼핑몰을 나왔다. 야외주차장 가는 길목에 있는 신호등 앞. 신호가 바뀌어 한발을 막 내딛는 순간 몸과 머리가 각각 따로 놀아서 그랬는지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통이 머리가 내린 명령을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이런 일이 빈번하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길고 좁은 치마 덕분에 일어나기도 힘들어 엉덩이를 하늘로 올리고 이리저리 뒹굴뒹굴. 

길을 건너려던 아주머니 한 분이 손을 내밀며 “다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는다. 난 창피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다친 것보다 너무 쪽팔려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쪽팔리기는요. 안 다쳤음 됐네요.” 아니 도와준 분한테 도대체 난 뭔 말을 한 거야.

멀리 길을 가는 아줌마를 불렀다. 아줌마가 뒤돌아본다. 난 허리를 굽혀 고맙단 말을 했고 그녀도 같이 허리를 굽혀 답을 했다. 휴, 늦게나마 인사는 잘한 것 같다. 그런데 새로 산 치마랑 명품 핸드백이랑 신발 속 양털까지. 커피랑 우유 거품이 쏟아져 엉망진창이다. 끝나겠지, 끝나겠지 했던 이놈의 코로나. 발병한 지 이년이 넘어가고 있다. 이제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리 기를 쓰고 무리한 외출도 하지 않았을 것을. 

코로나 시대에 유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C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마스크와 손 소독제가 필수품이고 학교에서도 마음껏 뛰어놀지 못한 아이들. 중요한 시기에 장기간 ‘집콕’한 이 세대가 기존세대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아무쪼록 무탈하게 잘 자라서 사회적응에 아무 문제 없었으면 좋겠다. 

코로나 초기에 마스크 착용을 부정적으로 여겼던 영국에서 얼마 전 마스크에 관한 재미있는 연구 발표를 내놓았다는 인터넷 기사를 봤다. 마스크를 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해 이성들이 평가한 매력점수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경우보다 42%나 높게 나왔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면 시각정보가 눈에 집중되는데 그 나머지는 뇌가 메우면서 더 멋지게 그려낸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래서 눈화장이 유행한다나 뭐라나. 우리의 뇌가 마스크 속에 가려진 부분을 가장 멋진 코와 입으로 상상한다는 것이다. 

직장인들도 코로나가 찾아준 ‘저녁이 있는 삶’을 환영한단다. 회식이 줄어 상사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아첨도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재택근무나 언택트 같이 개인이 맘대로 일까지 조절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난 얼굴을 마주 본 채 삼겹살을 구우면서 얘기하고 소주 한잔한 김에 가끔은 실없는 아첨도 하는 삶을 꿈꾼다. 코와 입을 마스크로 가리고 머리로 상상해내는 예쁜 얼굴보다는 덜 이쁘고 덜 높은 내 입과 코를 시원하게 드러낸 현실 속 맨얼굴로 여기저기 막 쏘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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