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④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④
  • 관리자
  • 승인 2006.08.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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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잊고 용서한다” 입장 정리

귀국 만류 얘기 듣고서 정신적 상처 받고 고뇌
한국서 누가오면 연날리기 시절 추억속으로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승만 전대통령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나 생의 후반은 비극적이었다. 85세 고령 나이에 대통령직을 수행한 영예도 잠시, 불행스런 하야와 아들 강석의 자살은  노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일을 당하던 당시만 해도 건강했다.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려고 했고, 이화장에 도착해서는 담장 밖 사람들이 보이도록 높이 올라서서 지지자들과 이웃 주민들을 위해 한참 동안을 서 있었을 만큼 신수가 좋았다. 하지만 그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내상을 입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당시 이 대통령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뒤에 회고하기도 했는데, 특히 아들 강석의 죽음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가 됐다고 한다. 강석을 맞아들이면서 경무대에 웃을 일이 더 생겼다면서, 이승만 대통령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그 애가 오면 함께 먹을 테니 아껴두라’고 늘 부탁했다고 한다. 또 강석이 현관문에 들어서면 반기면서 빨리 먹을 것을 챙겨오라고 재촉하기도 했고 목욕하는 것을 보고 등을 밀어주겠다고 목욕탕 문을 두드리며 장난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정을 쏟았던 아들의 자살 소식은 무엇보다도 대통령에게 충격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일이 나이와 함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 간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 뒤 실어증까지 겹쳐 이 대통령은 유창하게 구사하던 영어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충격 속에 하와이로 옮겨가서 보낸 이 대통령의 마지막 몇 년은 비교적 평화로왔다. 나이 들어 뜻하지 않은 일로 정신적 충격을 당한 노인들이나 그런 노인을 수발하는 사람들이 이 대통령의 마지막 몇 년의 을 참고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와이 동지들의 관심과 따뜻한 정으로 정신적인 상처 치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 대통령 자신은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하와이로 갔던 것이다. 하와이 한인 동지회장인 최백렬 씨가 대통령에게 필요한 휴양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별장을 내놓고, 체류비와 여비를 부담하기로 하여 이루어진 여정이었다.

 

기한이 차면서 이 대통령은 귀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측근들은 귀국할 여건이 되지 않아 좀 더 요양을 해야 한다고 만류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망명 아닌 망명을 한 셈이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권좌에서 물러나 이런 방식으로 망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지도 모른다.

 

별장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 대통령은 다시 당분간이라는 전제 하에 호놀룰루 시 매키키가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얻는다.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때의 동지들과 교인들의 도움으로 쓰던 가구며, 전기밥솥, 남비 등 두 내외가 살림을 살 수 있는 간단한 세간도 장만하게 되었다. 영어를 잃어버렸을 정도로 극심한 충격 속에서도 비교적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옛 동지들과 교인들의 관심과 따뜻한 위로 덕분이었다.

 

대통령 내외는 요양지의 보통 노부부로 평범하게 시간을 보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후일 “그때 나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준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하루 종일 쉴새 없이 집안 일을 했고, 대통령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대통령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 손질을 하면서 시름을 달랬다.

 

적당한 보행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정해서 두 내외가 나란히 산책을 하기도 했다. 또 변변치 못했으나 대통령은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들었다. 특히 두 내외는 떡국을 자주 즐겼는데, 방문한 손님들에게 떡국을 대접했던 일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후일 자주 회상하곤 했다.

 

하와이 체류가 오래되면서 이 대통령은 아들 인수씨를 맞이하면서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포겟 엔드 포기브(Forget & Forgive :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한다)’는 한마디였다. 그것으로 모든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아들 인수씨는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몇 년 동안 대통령은 고매한 품격을 잃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시를 짓기도 하고, 시를 읊조리기도 했으며 시조창으로 정몽주 같은 옛 선비들의 시를 음송하기도 했다.

 

추하지 않은 마지막 모습  

 

대통령의 기호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은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는 30대 무렵에 끊었다. 그러니 마땅한 기호가 없었다. 다만 차는 밀 껍질과 호밀의 겨를 함께 까맣게 볶아서 빻은 포수툼(postum)이라는 구수한 영양차를 즐겼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책에서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이 포수툼 차를 챙겨 나오던 얘기를 눈물겹게 기억하곤 했다.

 

“주방으로 내려가 찬장 서랍을 열고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과 반 쯤 남은 작은 찻병을 핸드백에다 챙겨 넣고 따라나섰다.”

 

이 차는 미국 몬태나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옛 동지가 보내준 것이었다. 두 내외가 하와이에서 요양할 때 즐겼으며, 나중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들 인수씨와 함께 이화장으로 돌아와 살면서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건강은 87세 되던 해 회복 불능으로 나빠지고 말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후일, 하와이 총영사를 통해 한국 정부가 대통령의 귀국을 만류한 것이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삶이 무의미해져 버렸던 듯하다.

 

1962년 초, 프란체스카 여사와 아들 인수씨는 하와이 트리풀러 육군 병원으로부터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 때로부터 3년여를 병상에서 보내는데 이 시기의 대통령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어찌 보면 아름답고 어찌 보면 귀여운( )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대통령의 머리속에 고향산천의 풍경이 완연한 양 한국에서 누가 오면 ‘지금도 청량리 밖에는 누런 벼이삭이 굽이치고 있는가  언제 다시 그것을 보고 죽을런지’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어릴 때 그곳에서 메뚜기를 잡고, 남산에서 연날리기 하던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총기를 잃게 되면서는 집안의 사소한 일도 간섭하는 보통 노인이었다고 했다. 시장을 봐온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써버렸다고 프란체스카 여사를 타박하기도 했다. 건망증이 심해져서 여비가 없어 귀국을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12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귀국할 여비를 걱정할 정도로 빈손이었다. 그리고 1964년 7월 19일 새벽 90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때 대통령이 쓰던 식탁, 조립식 옷장 등 가재도구가 지금도 이화장에 궁핍스럽게 남아 있다. <끝>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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