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보호구역, CCTV도 없어 ‘유명무실’
노인보호구역, CCTV도 없어 ‘유명무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2.02.28 10:51
  • 호수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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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단속장비 설치 규정 없어… 노인 보행자 사망 비중 계속 늘어
서울시가 지난해 4월 성북구 장위시장을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며 제시한 조감도에는 안전 펜스, 노인보호구역 표지판, CCTV, 신호등이 나타나 있지만(왼쪽, 붉은 화살표 부분) 2월 현재 시장은 크게 바뀐 게 없다.
서울시가 지난해 4월 성북구 장위시장을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며 제시한 조감도에는 안전 펜스, 노인보호구역 표지판, CCTV, 신호등이 나타나 있지만(왼쪽, 붉은 화살표 부분) 2월 현재 시장은 크게 바뀐 게 없다.

교통사고 많은 시장 주변도로는 상인들 반발로 ‘실버존’ 지정도 못해

예산도 스쿨존에 비해 턱없이 부족… 실버존 확충하고, 관리 개선해야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이곳이 주‧정차금지구역인 것도 몰랐어요.”

지난 2월 22일 서울 종로구 락희거리에서 만나는 정길수(78)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날 락희거리는 종로구의 다른 길처럼 많은 차들이 주차돼 있었다. 헌데 이 거리는 2017년 노인보호구역(실버존)으로 지정돼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과 마찬가지로 주·정차가 금지됐고 시속 30㎞ 이하로 통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보 부족과 실효성 문제로 인해 실버존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정 어르신은 “노인보호구역인지도 몰랐던 만큼 보호받는 느낌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최근 지자체들이 어르신들의 보행 안전을 위해 실버존을 설치하고 있지만 홍보 부족과 재래시장 등 노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지정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교통사고 보행자 사망자 수가 줄어드는 와중에 노인보행자 사망자 비중은 되레 올라가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행안부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20년 교통사고 보행자 사망자 10명 중 6명 가량은 노인이었다. 우리나라 보행자 사망자 수는 2011년 2044명에서 점차 줄어 2020년 1093명을 기록했지만 노인보행자 비중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11년 43.2%(883명)에서 2015년 50.6%(1910명 중 919명), 2019년 57.1%(1302명 중 842명), 2020년 57.5%(1093명 중 628명) 등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장 최근 통계인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10만 명당 보행 중 노인 사망자 수는 9.7명으로 OECD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2위인 칠레(7.6명) 보다는 2.1명, 3위 폴란드‧리투아니아(4.3명) 보다는 2배 이상 많았다.

정부는 지난 2008년 도로교통법을 개정해 실버존을 운영하고 있지만 스쿨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까지 지정된 스쿨존은 1741곳인 반면 실버존은 164곳에 불과하다. 

또 스쿨존 내 무인 교통단속장비 설치는 법으로 의무화돼 있지만, 실버존 내 단속장비 설치는 법에서 강제하고 있지 않아 지난 2020년 기준 실버존 내 단속장비 설치율은 2% 남짓인 것으로 파악됐다. 경기도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경기도 내 스쿨존은 3900여곳에 달하지만 실버존은 340여곳으로 10분의 1에도 못미친다.

경찰과 도로교통공단은 노인 통행인구를 감안할 경우 전국에 7157곳의 실버존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나 전국의 실버존은 2018년 현재 1600여곳에 불과하다.

행안부가 지역교통안전환경개선 예산 2511억원 중 79.2%에 달하는 1988억원을 어린이보호구역 개선에 집행했지만 노인보호구역에 배정된 예산은 고작 70억원(2.8%)에 그쳤다.

설치 장소도 문제다. 현재 실버존은 양로원·경로당·노인복지시설 등 인근에 설치될 수 있지만  2020년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는 시장(65%), 역·터미널 주변(14%), 병원주변(12%) 순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등 지자체가 시장 주변 도로를 실버존으로 지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노인 보행사고 방지 등을 위해 성북구 장위시장,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 시장, 도봉구 도깨비 시장, 동작구 성대시장 등 네 곳 주변도로를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하려고 했다. 해당 시장은 물건과 시장 이용객, 불법주정차 차량 등으로 복잡하게 뒤엉켜 전체 노인 보행사고의 40% 가량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법주정차를 금지시키면 시장에 오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상인들의 호소에 따라 안전시설물을 설치하고 실버존 지정은 보류한 상태다.

서울시 관계자는 “코로나로 인해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실버존까지 지정되면 시장에 올 사람이 없다는 상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계획을 보류하고 안전한 보행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어린이들보다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노인들의 보행 안전을 위해 실버존 확충과 필요성 홍보 그리고 미흡한 기존 실버존 관리방법도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지역마다 노인들의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장소를 해당 지역 지자체장이 자율적으로 실버존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추가로 부여해야 한다. 또 어르신들의 활동 반경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실버존 설치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노인은 젊은 사람들의 비해 보행속도가 느리고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노인보호구역의 확대가 필요하다”면서 “노인 보행자가 많은 지역의 횡단보도 길이를 줄이는 등 교통시스템의 전반적인 차원에서 노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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