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우대제도와 경로우대문화
경로우대제도와 경로우대문화
  • 관리자
  • 승인 2009.04.03 17:06
  • 호수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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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차흥봉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79년, 보건복지가족부 노인복지담당 공무원으로 일할 때 국제사회보장학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참석차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 개혁개방 훨씬 전의 일이다.

한국과 소련사이에는 물론 국교가 없었다. 주최 측에서 소련 국적기를 타면 무료서비스를 해준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불안해서 돈을 주고 일본 비행기를 탔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도착하니까 북한기가 나부끼고 있었고, 공항직원들이 군복처럼 생긴 제복을 입고 있었다. 사뭇 무시무시했다. 회의기간 내내 국가정보요원인 케이지비(KGB) 안내요원이 따라 다녔다.

일요일을 골라 안내요원을 따돌리고 모스크바대학을 구경하러 나섰다. 지도를 사서 지하철을 타고, 대학근처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를 타는 학생들은 현금을 내는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은 흰 종이쪽지를 내고 타고 있었다.

궁금해서 옆에 있는 대학생에게 물어보았다. 노인은 경로우대차원에서 버스를 무료로 이용한다는 대답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노인을 공경하는 이러한 인간적인 광경을 볼 수 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귀국하자마자 출장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장관에게 소련의 경로우대 현장 체험을 보고하고 우리나라도 경로우대제도를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우리야말로 경로효친의 전통적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로서 노인을 공경하는 우대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시 국가에서 실시하는 노인복지프로그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노인복지정책으로서도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다. 장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두 찬성했다.

이렇게 하여 도입한 것이 경로우대제도다. 당시 보건사회부장관훈령으로 경로우대규정을 제정해 1980년 5월 8일 어버이날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행했다. 그 다음해 노인복지법을 제정할 때 법적 제도로까지 만들었다.

노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철도, 지하철, 시내버스 등의 교통요금, 공원, 고궁 등의 공공시설 이용요금, 목욕, 이발 등의 서비스 이용요금을 65세 이상 노인에게 무료 또는 할인해 주는 혜택이 그 내용이었다. 이 때 만든 경로우대제는 경로효친의 전통적 미덕을 살리고 노인복지의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그 취지였다.

경로우대제는 그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목욕, 이발, 미용과 같은 민간서비스 업종은 민간사업자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변경됐다. 시내버스요금은 무료에서 쿠폰지원제로, 다시 현금 교통수당제로 변경됐다가 기초노령연금제도의 실시를 계기로 금년부터 폐지됐다.

지금까지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경로우대제가 지하철 이용제도다. 지하철은 그 후 경로석까지 추가돼 그야말로 경로우대문화의 시험무대가 되고 있다. 우선 도시지역의 많은 노인들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면서 아주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고 독립기념관이나 아산 현충사까지 다녀오는 소풍코스도 인기가 높다. 경로석은 대체로 노인들이 비교적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지하철을 타본 외국인들이 모두 경로우대제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해외동포들은 고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지하철 경로우대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로우대제도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고령화현상에 따라 노인인구가 증가하면서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노인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지하철 적자운영을 이야기할 때면 늘 이 문제가 등장한다. 심지어 경로우대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부 자격 없는 사람이 우대권을 이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노인용 무료이용카드를 젊은 배우자, 심지어 자녀에게 주고 자신은 종이우대권을 받아 또 무료로 이용하는 노인도 있다. 경로우대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제도를 망가뜨리고 있다. 경로석의 풍경도 천태만상이다. 젊은 사람이 버젓이 앉아 있기도 하고, 나이 든 사람끼리 서로 먼저 앉으려고 싸우는 꼴불견도 연출되고 있다.

경로우대제의 정신은 노인을 공경하고 노인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노인공경과 노인복지는 세대 간 연대와 공동체사회의 상호배려질서에 기초하는 것이다. 노인은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 왔기 때문에 후손들과 국가사회가 공경하고 대우하는 것이고, 반면에 노인은 먼저 세상을 살아온 경험자로서 후손들과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른으로서 도리를 다 하는 것이 그 정신의 기초이다.

지공좌양 불역열호(地空座讓 不亦悅乎·지하철 공짜로 타는 처지에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고 즐거운가), 논어 구절을 인용해 만든 반 우스갯말이다. 노인들이 이처럼 넓은 마음으로 어른답게 행동하면 노인공경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젊은이들도 따라서 자리를 양보하는 상호배려의 아름다운 경로우대문화가 꽃피울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남녀노소가 잠시 만나 교류하는 지하철에서 이렇게 만들어지는 경로우대문화는 우리 사회를 보다 더 살맛나는 사회로 바꾸는데 기여할 것이고, 지하철 무료요금제도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게 하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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