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정문 개방… 74년만에 시민 품으로
청와대 정문 개방… 74년만에 시민 품으로
  • 조종도 기자
  • 승인 2022.05.16 14:13
  • 호수 8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날 함성과 함께 입장… 시민들 “믿기지 않는 일”
국민대표 74인을 비롯한 시민들이 5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 개방은 74년 만에 처음이다.	사진=연합뉴스
국민대표 74인을 비롯한 시민들이 5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 개방은 74년 만에 처음이다. 사진=연합뉴스

2시간마다 6500명씩 들어가… 하루 최대 3만9000명 관람 

본관, 영빈관, 녹지원 등 구성… 석불‧오운정 등 문화재도 다수

[백세시대=조종도기자] 1948년 이후 74년간 대한민국 최고 권부의 상징이었던 청와대가 5월 10일 오전 11시 37분 정문을 열고 시민을 맞이했다. 국민대표 74명을 필두로 사전 신청을 거쳐 당첨된 사람들이 ‘청와대 정문 개방’이라는 구호와 함께 일제히 안으로 들어간 것. 74명은 최고 권력자들이 머문 기간인 74년에 맞춰 선정됐다.

이날 입장한 시민들은 “기대감에 잠을 못 이뤘다”, “이런 곳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다”며 밝은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이 시각 국회 본관 앞에서는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고 있었다. 청와대 개방은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은 광화문으로 이전을 검토하다 용산의 국방부 청사로 최종 결정하고 3월 20일 공식 발표했다. ‘졸속 이전’이라는 비판이 일었으나, 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 또 여러 바쁜 일들 때문에 이전이 안 된다고 본다”면서 강행했다.

개방 첫날인 10일에는 약 2만6000명이 청와대 본관 등 경내를 관람했다. 관람객은 2시간 간격으로 6500명씩 입장했다. 11일부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6500명씩 입장하며, 하루 최대 관람객은 3만9000명이다.

청와대 개방 행사는 궁중문화축전이 막을 내리는 5월 22일까지 이어지며, 23일 이후 관람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11일 현재 20일, 21일만 신청이 가능한 상태이고 이마저 곧 마감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경내 구조

청와대는 본관과 영빈관, 녹지원, 상춘재, 춘추관, 대통령관저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본관을 중심으로 왼쪽에 영빈관이 있으며, 오른쪽에 상춘재, 녹지원, 춘추관이 있다.

오른쪽 맨 위에 있는 대통령관저 뒤편에는 보물 1977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생김새가 수려해 ‘미남불’(美男佛)로 불리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 데라우치 총독에 의해 경주에서 옮겨졌다.

인근에는 청와대 내 정자인 오운정(서울시 유형문화재)도 있다. 오운정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에 지은 정자로, 현판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청와대 서남쪽(왼쪽)에는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의 위패를 모신 ‘칠궁’이 있다.

◇청와대는 어떤 곳

청와대 자리(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는 본래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을 청사 건물로 사용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이 곳에 건물을 짓고 총독관사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경무대’라는 이름을 짓고 관저 및 대통령 집무실로 이 건물을 사용했다. 경무대가 지금 청와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푸른 기와 집’을 뜻하는 ‘청와대’(靑瓦臺)란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1960년 당시 4·19 혁명 분위기 속에 경무대가 지닌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이름을 바꿨다.

이후 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62년의 세월 동안 청와대는 곧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통했다.이 청와대를 겨냥해 북한은 무장공비를 보내 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1968년 1월 12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대원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부요인 살해를 목표로 청와대 뒷산으로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가 그것이다.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이른바 ‘김신조 루트’는 최근 북악산 개방 결정을 통해 일반 시민들도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조종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