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 연은분리법, “세계 최초 銀 추출법…임진왜란 촉발하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 연은분리법, “세계 최초 銀 추출법…임진왜란 촉발하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5.23 13:24
  • 호수 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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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때 일반 백성이 개발… 납 포함된 은광석서 녹는점 이용, 은 추출

중종반정 이후 은 채취 금지… 일본서 기술 받아 은 대량 생산, 조총 구입

15세기 일본의 은 제련소. 구리에서 은을 추출하고 있다.
15세기 일본의 은 제련소. 구리에서 은을 추출하고 있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가 임진왜란(1592~1598년)이다.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 입은 피해의 실상을 안다면 일본에 대해 분노하고, 당한 만큼 일본에 되갚아주어야 한다는 설욕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수많은 부녀자들이 강간당했고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끌려가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각지로 팔려나갔다. 전 국토가 황폐화돼 경작지가 전쟁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불국사 등 수많은 문화재가 화재로 전소됐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들도 크게 훼손됐다.

이처럼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임진왜란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생소한 법(?)에 의해 촉발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연은분리법은 법(Law)이 아니라 조선에서 최초로 개발한 은(銀) 추출법이다. 이 기발한 신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이 막대한 은을 생산하게 됐고 그로 인해 얻은 부로 조총을 구입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즉 우리의 독창적인 기술로 말미암아 스스로 비극적인 전쟁 피해를 자초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가 말이다. 

연은분리법은 고전적인 회취법(灰吹法·cupellation)의 일종이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많이 나는, 은이 다량 함유된 납광석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해 ‘단천연은법’이라고도 한다. 회취법은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납만을 산화시키고 은을 골라내는 기술이다. 이 탁월한 추출법이 연산군 시대에 처음 선보였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연산군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으로 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전교’란 임금의 명령이다.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다”며 흡족해 하고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단천에서 이 법을 활용해 은을 생산하도록 한다. 공조판서 정미수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 하는 체은납세제와 행장을 발급하라고 건의했고 연산군은 이를 시행했다.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 당 하루에 은 1냥이었다. 

당시 전 세계 은 추출법은 광석을 태운 다음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원시적인 방식이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들인 공에 비해 생산량도 미비했다. 이 탁월한 신기술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을까. 그것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일어난 중종반정 때문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 유부녀를 겁탈하고 민간인 재산을 빼앗고 지나친 향응을 즐기는 등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심이 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반정’이란 실정을 하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 왕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성희안은 반정의 기획자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이조참판 자리에서 파직되자 난을 일으켰다. 박원종도 연산군이 자신의 누나를 범해 임신을 시켜 가문에 먹칠했다는 이유로 주동자가 됐다. 

9월 2일 새벽, 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의 사저를 지키는 동시에 연산군 최측근을 제거해 후환을 없앤 뒤 창덕궁에 있던 연산군의 신병을 확보했다. 이후 대비에게 나아가 반정 사실을 알리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선에선 신하들이 주축이 돼 왕을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울 때 대비에게 고한 뒤 대비의 명을 받들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게 의례적인 절차였다.

반정세력은 바로 정국공신으로 책봉돼 중종을 쥐락펴락했다. 연회에서 중종은 이들이 일어선 다음에야 자리를 뜰 수 있을 정도였다. 중종반정은 왕과 신하, 민심 사이의 역학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종은 1516년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워 은광 채굴을 금지시켰다. 명나라의 조공요구를 염려해 은광을 폐쇄했다는 말도 있고, 은을 계속 생산하면 교역이 번창하고 그로 인해 농업을 중시하는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조정에서 은 채굴을 막자 조선 상인들은 지방 관리와 손잡고 은 광산 노다지이자 손을 타지 않은 일본의 은맥에 주목했다. 일본은 은광석이 풍부하지만 제련 기술이 부족해 은 생산이 풍족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서 경수와 종단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은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당시 은 생산량 세계 2위였던 일본의 은 수출량은 연 20만kg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 시마네 현에 있는 이와미 은광은 세계적인 은광으로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이 은광 표지판에 1533년 조선으로부터 회취법이 전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43년 일본에 포르투갈 상선 하나가 표류하다 정박했다. 이들이 가져온 화승총을 본 일본 영주가 조총 두 자루를 2000냥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10냥이면 병사 한 명의 1년 치 봉록이다. 그만큼 은이 흔하고 많았던 것이다. 은의 대량생산은 일본에 군사적인 이점을 안겨주었다. 

일본에선 화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료 초석이 귀했지만 은을 팔아 중국 남부 해안지방에서 손쉽게 구했고, 임진왜란 전쟁 비용도 은으로 조달함으로써 강력한 조총부대를 육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초반 조선의 연이은 패전이 훈련의 미숙함 탓도 있지만 화살보다 빠르고 치명적인 일본의 조총 때문이라는 판단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임진왜란에서 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게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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