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렘브란트 그림 복원에 한지가 쓰인다고?”
[백세시대 / 세상읽기] “렘브란트 그림 복원에 한지가 쓰인다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5.30 10:18
  • 호수 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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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유태인보다 똑똑하다”고 한다. 적어도 종이에 관해선 맞는 말인 듯싶다. 세계가 한지(韓紙)의 우수성을 인정해서다. 한지는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복원·보수에 쓰인다. 현재 루브르에서 한지를 사용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아주 귀중한 그림의 여백을 복원할 때다. 어떤 회화 작품 중에는 절대 원본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런 작품의 여백을 복원할 때 한지를 사용한다. 한지가 안정성이 높아서 원본이 파괴될 위험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메탈로 갈릭(metallo garlic) 잉크를 사용한 작품을 복원할 때다. 산을 조합해 만드는 이 잉크는 심오한 검은색을 자랑하는 대신 빛과 공기에 노출될수록 갈색으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잉크가 칠해진 종이가 약해지면서 구멍이 생긴다.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년)가 이 잉크를 많이 사용한다. 그의 작품 중 파괴되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복원할 때는 미세하게 얇고 섬세한 한지를 덧대곤 한다. 

셋째는 오래된 가구를 복원할 때다. 수세기 전 만들어진 목재 가구들은 습도나 열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지나면 갈라지거나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손상된 가구를 복원할 때도 한지를 사용한다.

전주 한지는 지난 2017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 의 부서진 책상 손잡이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또 9세기 코란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로스차일드가(家)로부터 약탈한 기도서 등 로스차일드 컬렉션의 복원 재료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어 닥종이라고도 불린다. 종이를 최초 개발한 중국에서 2~6세기 삼국시대 때 만주를 통해 유입됐다고 한다. 내구성이 강해 한지로 만든 천년 이상 된 고문서의 보존 상태가 좋다. 700년대 제작된 현존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도 잘 보존돼 있고, 그보다 오래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196호·리움미술관 소장) 같은 고문서도 최근 출토되고 있다. 

한지는 산성을 띠는 서양의 종이와 다르게 중성을 띠고 있어서 변색에도 매우 강하다. 여러 겹을 댄 뒤 옻칠을 하면 가죽처럼 단단하고 질겨서 그릇, 장판 등 생활용품이나 심지어 갑옷까지 만들 수 있다. 최근에는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로 수의로도 각광 받고 있다. 단점은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등 제작비가 비싸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지를 물로 씻어서 말린 다음 재사용하는 관습이 일반적이었다.

한지 제조법 중 문경의 ‘외발뜨기’ 작업을 알아준다. ‘외발뜨기’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고 으깬 반죽(섬유)을 물에 푼 다음 대나무 발을 이용해 종이를 뜨는 전통방식이다. 이때 대나무 발을 잡아주는 천장 줄이 한 줄이어서 외발뜨기라 불린다. 장인이 한지 반죽 물을 떠서 발을 좌우로 흔드는 동작을 거듭할수록 희고 얇은 한지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한지의 유연성·내구성이 뛰어난 이유가 이렇게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발뜨기로 만든 한지는 밀도가 높아서 결이 일정하고 질기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에 비해 섬유 길이가 더 길어서 더 오래가고 더 안정적이다. 이는 습도와 온도에 저항성이 높다는 뜻으로 보존이 중요한 미술품에는 핵심 요소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서양에선 화지가 더 많이 쓰인다. 이미 수 세기 전 서양에 들어갔고, 클로드 모네 같은 작가들이 화지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등 여러 면에서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대량 생산·공급도 화지의 유행에 일조했다.

화지는 2014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반면 한지는 아직 못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유명 전시관에서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한 이상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백세시대=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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