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신탁(神託)
[디카시 산책] 신탁(神託)
  • 디카시·글=이기영 시인
  • 승인 2022.06.13 10:51
  • 호수 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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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神託)

신의 말을 듣는 자여

신의 말을 기다리는 자여

 

폐허뿐인 땅을 시간이 떠받치고 있는 건가요

폐허뿐인 땅에서는 시간마저 하염없어지는 건가요


모든 건물은 다 허물어져 버리고 지난날의 영화를 붙들기라도 하려는 듯 기둥만 남아 있는 배경. 그 앞에서 도도한 자세로 먼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는 무슨 생각에 젖어있는 것일까. 하나 남은 기둥마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인지, 무너진 기둥 하나를 이제 막 일으켜 놓은 것인지 하염없는 시간 앞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양이의 눈빛이 나를 압도한다. 신탁을 기다리는 제사장이 저러했을까. 제사장이 들려줄 신탁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빛이 저러했을까. 

터키 에페소 페허에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신들만의 천국을 이루며 한가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저 응시 앞에서 내가 지금 가진 것들과 지나쳐 온 시간들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곧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가 되어 기념품 가게로 와서 고양이 도자기를 20달러에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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