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여름 정원에서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여름 정원에서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2.07.04 11:01
  • 호수 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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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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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덮은 해무가 걷히자

햇살 쏟아지며 더위가 몰려와

이건 각본 없는 여름 드라마

모든 일은 때가 되면 이뤄지는데

나는 뿌연 미래에 조바심

3일 내내 동해바다에서 올라온 짙은 안개가 바다를 덮더니 서서히 설악산을 감아갔다. 바다 안개인 해무는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어떤 날은 설악산을 다 덮어버리기도 한다. 우뚝 솟은 빌딩도 10층 이상으로는 해무 속에 잠기고, 온 도시가 논과 밭이 구름 속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3일 만에 걷히더니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는 눈이 부신 푸른 하늘이 쏟아졌다. 짙푸른 하늘은 꼭 옥빛 바다색을 닮아 있었다. 맑은 하늘을 받아낸 바다엔 잔물결이 반짝이며 수천, 수만 개의 윤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맑은 하늘에서 쏟아진 햇살은 급격히 바다와 땅의 온도를 올려갔다. 새벽 18도에서 시작된 기온이 한낮 30도까지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다. 차갑던 바다가 뜨거워지고, 달궈진 열은 밤에도 떨어지지 않고, 선풍기를 틀어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새벽 잠시의 서늘함은 이내 해가 뜨자마자 다시 또 모든 걸 다 쪄버릴 기세로 온도가 올라갔다. 그러다 갑자기 어둑어둑한 동해바다 쪽에서 엄청난 먹구름이 끼여왔다. 아차 싶어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후두둑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후려쳤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엄청난 빗소리와 번쩍이는 번개의 섬광, 그리고 하늘이 쪼개지는 듯 내려치는 천둥소리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삼켜지는 듯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쏟을 만큼 쏟아낸 먹구름은 이미 사라졌고, 뜨거운 태양이 다시 땅을 말려가는 중이다. 

이 모든 날씨의 변화가 고작 나흘간의 일이다. 처음 몇 년 속초에서 이 여름을 맞을 땐 이 유난스러움이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하지만 지금은 동해와 설악산이 만들어 내는 각본도 없는 속초의 여름 드라마를 잘 이해하고 있다. 

계절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이런 진통이 없이는 결코 지나가질 않는다는 것도... 이제 시작된 여름은 앞으로도 얼마간 잠 못 드는 더위를 만들 테고, 가만히 있어도 기운을 쭉쭉 빠지게 할 테지만, 이 또한 지나갈 일이고 다시 찬바람 부는 가을이 올 것임도 잘 안다. 

그래서 모든 일은 때가 되면 일어나고, 때가 되어야 사라짐을 충분히 알만큼 안다. 하지만 안다는 것과 그걸 기다리고 받아드리는 건 참 다르다.

요즘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준비를 하는 중이다. 시간도 걸리고, 꼼꼼히 챙기는 시간이 필요한데 자꾸 빨리 결과를 내려고 조급히 행동하니 꿈자리마저 어지럽다. 그러다 오늘 아침 새벽에 깨어 어수선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잠시 켰다가, 이내 접고 정원으로 나갔다. 새벽의 선선함 속에 앞마당 깔아둔 벽돌 틈에 낀 잡초를 제거하며 두어 시간을 보내며 문득 16년 전인 2006년의 여름이 생각났다. 

영국 큐가든에서 인턴 정원사로 일하며 그때도 지금처럼 정원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하던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고 참으로 용감하게도 두 딸과 유학길에 올랐던 그 시절. 그때의 나는 눈 부실 줄 알았던 유학 생활과는 달리 안개 속처럼 뿌연 미래의 불투명에 갇혀 있었다. 

이 낯선 곳에 나는 왜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중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가. 잡초를 뽑으며 그 묵묵한 질문에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16년 전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경험이 늘었고, 그래서 현명해졌어야 할 내가 같은 질문을 삼키고 있음에 쓴맛이 돌았다.

2006년 서른아홉의 나, 그리고 2022년 쉰다섯의 나.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나에게 묻는 질문은 같다. 이 해무처럼 뿌옇게 껴있는 불투명한 미래는 언제쯤 맑게 갤 것인가? 과연 나는 현명한 나의 미래를 받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이 어리석은 질문의 답을 나는 잘 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 때가 되면! 그걸 알면서도 기다리고 받아드리는 게 참 어렵고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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