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노인에게 내일이란 없다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노인에게 내일이란 없다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2.08.01 13:50
  • 호수 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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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목 디스크 걸려 걷기조차 힘드니

땀 뻘뻘 흘리는 일꾼이 부러워져

그동안 ‘이것만 끝내고…’라며

업무, 집안일에 매달리다 이 지경

이젠 내 몸 아끼며 살련다

지난밤, 길고 긴 시간여행을 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양 백 마리를 몇 번씩이나 세어보고, 수면에 좋다는 음악이며 아로마까지. 별별 짓을 다 해봐도 잠이 들지 않았다.

잠이란 녀석이 원래 그렇더라. 잡으려면 잡을수록 저만치 달아나 버리는 골치아픈 놈. ‘나 잡아봐라’ 게임하며 놀자는 건가. 에라이, 관둬라. 잠 좀 설쳤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TV를 틀었다. 이리저리 돌린 채널 끝에 찾아낸 드라마. 족히 30~40년은 된 드라마일 것이다. 요실금 광고 등 TV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그 할머니는 막 피어난 찔레꽃 같은 모습의 단발머리 소녀였고, 예능프로에서 깍듯하게 어르신 대접을 받는 할아버지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모습이다.

세상에나. 저 여학생이 그 할머니라고? 어린 시절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나랑 같이 커온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지금이야 냉장고 한구석에서 시들시들 말라가는 머루포도같은 신세지만 말간 청포도같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허무하다. 변해버린 내 모습이 억울해서가 아니다. 웬만큼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사뿐히 내려앉을 것 같던 내 몸이 지금은 평지조차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파 야속해서다.

다섯 달 전에 심한 목디스크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다.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등이 심하게 결렸고, 담인가 싶어 침도 맞고 뜸도 뜨고 약도 복용했지만 통증은 심해지고 왼손까지 저리더니 급기야는 호흡도 가빠졌다.

급히 병원에 들러 MRI와 X-Ray(엑스레이)를 찍고, 독한 진통제도 주사로 맞았다. 경추 5번과 6번 사이 디스크가 탈출해 등 신경을 누르다가 그 디스크에서 나온 물질이 팔을 타고 내려간 바람에 팔이 저린 것이고, 호흡곤란은 터져 나온 디스크 때문에 갈비뼈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란다.

의사는 “집안일, 운전, 컴퓨터 보는 일, 운동, 그 어느 것도 하지 말고 그저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세요. 적어도 6개월은 지나야 조금씩 일상생활이 가능해질 겁니다. 그것도 뒹굴뒹굴을 잘한다면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큰일이다. 청소기도 만질 줄 모르는 남편이 집안일을 해낼 수 있으려나. 지금 벌여놓은 일도 많은데, 나 없이 제대로 돌아갈까.

침대에서 뒹굴거리기엔 아직 어리다. 칠십도 안됐다. 딱 2년만 더 일하고 신나게 여행 다니며 놀려 했는데. 이 시골엔 도우미도 없다. 끼니는 어찌 해결하나. 

병원을 오가며 창밖을 봤다. 밭일하는 할머니, 친구 손을 잡고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아줌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학생들, 음식배달 오토바이 아저씨, 땀을 뻘뻘 흘리며 도로 공사하는 아저씨 등이 보였다. 부럽다. 그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그들이.

“뼈를 보면 평생을 막노동 한 사람 같아요. 이제라도 몸 좀 잘 챙기시지요. 건강 관리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합니다. 잘못하면 마비가 와서 침대에 누워지내야 해요,”

우물쭈물하다가 후회한다고? 그거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아닌가. “나 죽거들랑 ‘우물쭈물하다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묘비에 적어달라”했다던 그 ‘버나드 쇼.’ 노벨상도 받고 유명한 극작가로 살았던 그조차도 죽고 나면 우물쭈물 미루다가 못한 일을 후회하게 된다는 걸 알았나 보다.

건강관리, 벌려놓은 일 끝내면 나도 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것만 끝나면…’ 이게 문제였구나. ‘애들 크면, 애들 결혼하면, 손녀 유치원가면, 이 일만 마무리되면…’이라고 말하면서 병이 날 때를 나는 기다린 게다. 우물쭈물하면서 말이다.

침대에서 뒹굴거린 지 벌써 5개월 째. 나 없으면 모든 게 안된다고? 그건 착각이었다. 최첨단 전자제품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잘 해내고 있다.

로봇청소기 덕분에 집은 더 깨끗해졌고 건조기와 식기세척기 덕분에 빨래는 뽀송뽀송하고 식기들은 살균소독까지 되어있다.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은 여성 문제도 후배들이 야무지게 더 잘 해내고 있다. 

노인에게는 확실하게 보장받은 내일이란 없다. 내일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자. 5개월 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분이 묘하다. 딱 한 달만 참자. 그때는 자발적으로 뒹굴뒹굴하며 살리라.

‘여보, 손목이 뒤로 젖혀지지 않네’ 남편이 ‘손목터널증후군’에 걸렸나 보다. 그거 며칠 지나면 금방 낫게 되어있다. 이왕 남편이 도맡아 한 집안일. 계속 일임해야겠다. 엄살도 피고 고통도 호소하며 이제부터라도 내 몸 내가 아끼며 살련다. 그래봤자 길어야 30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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