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1] 삼국유사로 본 ‘백제의 마지막 순간’, 의자왕의 탄식…“성충 말 듣지 않은 것이 후회로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1] 삼국유사로 본 ‘백제의 마지막 순간’, 의자왕의 탄식…“성충 말 듣지 않은 것이 후회로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8.16 13:35
  • 호수 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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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 "나당군이 백강과 탄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신라보다 국방력·건축기술 등 앞섰다고 신라 군사 깔봐

신하들의 서로 다른 말 사이에 우왕좌왕하다 판단 착오      

의자왕, 자식·백성들과 당나라로 끌려가 4개월 뒤 사망

[백세시대=오현주기자] 백제는 국방, 건축 분야에서 신라보다 앞선 나라였다. ‘삼국유사’에 달솔 상영이란 고위직 관리가 한 말이 기록돼 있다. 달솔은 백제의 16관등 중 2품 관직이름이며 ‘대솔’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람들은 여러 번 우리 군대에 패했으니 이제 우리의 병력을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군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먼저 한 군대로 신라 군사를 공격하여 그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의자왕(595년?~660년 11월)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인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전략회의를 연 자리에서다. 상영이 한 말의 요지는 “신라 군사는 약체이므로 공격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당나라 군사는 그렇지 않으니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의 군사력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드러난다.  

정관 17년 계묘년(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은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고 말했다. 

선덕여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 용춘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탑이 바로 신라의 대표적 호국탑 황룡사 구층탑이다. 구층탑은 높이가 66m 정도 되며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의 3배 높이다. 신라는 이 탑을 쌓을 기술이 없자 백제의 기술력을 빌렸던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갔던 백제가 졸지에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신라는 혼자서는 백제를 상대할 수 없자 당나라를 끌어들였다. 그렇더라도 삼국 가운데 문화예술이 가장 발달했고 국방력도 튼튼했던 백제가 어떻게 힘없이 무너진 것일까. 삼국유사는 백제의 멸망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군사의 우두머리 소정방(592~667년)이 13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산(지금의 산동성 문등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신라의 서쪽 덕물도(서해 덕적도)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력 5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그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지킬 계획을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아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으나 물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만 믿고서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사가 불리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날카롭게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싸우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신하는 “당나라 군사는 먼 곳에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신라 군사를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자왕은 어떤 주장을 선택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왕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지금의 전남 장흥읍 일원)에서 귀양살이하는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는 “대체로 좌평 성충의 의견과 같다”고 대답했다. 좌평 성충은 의자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니 한 말씀만 드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신이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용병은 그 땅을 잘 가려야 하니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적국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백제의 요해지(要害地))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으로는 기벌포(백강)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후 험한 요충지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흥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신하들의 잘못된 간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한 신하가 “흥수는 갇혀 있는 중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아끼지 않으니 그의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와 흐름을 따라 내려오게 하여 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을 탄현으로 올라와 지름길로 오게 하여 말이 나란히 지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때 군사를 놓아 공격한다면 닭장에 갇힌 닭과 같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의자왕은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는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충남 논산 부적면 일대)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도록 했다. 백제군은 네 차례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하여 결국에는 패했고 계백도 죽었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웅진성 30리쯤까지 와서 멈췄다. 백제군은 성안에서 모든 힘을 합쳐 항거했으나 나중에는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됐다. 당나라 군사가 승승장구하여 성으로 공격해오자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도다”라고 탄식했다.

의자왕의 아들 태자 융은 문을 열고 항복을 청했다. 소정방은 군사들에게 성채에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과 대신 그리고 장사 88명과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 장안(산시성 시안시)으로 보냈다. 660년 7월 18일로 백제 건국 678년만의 일이다. 의자왕은 그로부터 4개월 뒤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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