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2] 조선 왕의 장례 “5개월간 36가지 절차로 진행…시신에 110여 겹 옷 입혀”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2] 조선 왕의 장례 “5개월간 36가지 절차로 진행…시신에 110여 겹 옷 입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8.29 13:17
  • 호수 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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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왕 정조의 운구 행렬을 그린 발인반차도의 일부.
조선 22대 왕 정조의 운구 행렬을 그린 발인반차도의 일부.

즉위한 해 소나무로 관 짜 매년 칠… 나중엔 벽돌처럼 단단해져
왕세자·왕자들, 머리 풀고 3일 금식…백성들 3개월 간 혼인 불가  
왕의 상여 194명이 한조 이뤄 메… 운구 행렬 2400여명 이르기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차에 따라 진행됐다. 왕위에 오르면 즉위하는 그 해에 소나무로 왕의 대관을 짰다. 매년 칠을 올려 나중에는 대관이 벽돌과 같이 단단해졌다. 왕이 죽음에 임박하면 대신과 세자를 불러 모아 다음 왕으로 세자를 지목하고 유언과 함께 국새를 넘겼다.

왕이 숨을 멈추면 입과 코 사이에 햇솜을 올려놓아 움직이는지 여부를 살폈다. 임종이 확인되면 사람들은 곡을 시작했다. 왕이 죽으면 통상 ‘상(上)이 승하(昇遐)했다’라고 표현했다. 

내시는 왕이 승하한 건물 위로 올라가 왕이 입던 평상복을 흔들며 ‘상위복’(上位復)이라 세 번 외친 후 밑으로 던졌다. 상위복은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이는 죽은 자가 자기 체취가 밴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왕비의 경우 ‘중궁복’이라고 소리쳤다. 이 풍속은 일반에서도 있었다. 통칭 ‘가는 혼을 부른다’고 해서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왕의 종친 및 신하들은 상투를 풀고 소복을 입었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 왕자들은 3일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왕이 승하한 지 3개월까지는 혼인도 못하고 동물의 도살이 금지됐다.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과 염습 등 관련 사무를 관장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을 설치해 각각의 업무를 나누어 담당했다. 국장이 끝나면 도감마다 의궤를 작성했다. 조선 왕실 의궤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왕이 승하한 당일에 목욕하는 의식을 행했다. 쌀 씻은 물과 박달나무로 달인 탕으로 시신의 머리를 감기고 발톱과 손톱을 주머니에 담고 탕에 몸을 씻고 정성껏 닦은 뒤 수의를 입혔다. 평상시 입던 소복, 첩리, 곤룡포 위에 9벌의 옷을 입히고 흰 병풍과 휘장을 쳤다.

함(含)이라고 해서 왕의 입속에 쌀과 진주를 물렸다. 망자가 저승에 갈 동안 먹을 식량을 준다는 의미다. 왕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시신 아래 얼음을 넣었다. 승하한 지 3일째 되는 날 시신에 저고리와 치마 19겹으로 옷을 입힌 후 이불로 감쌌다. 승하한 날 지붕에서 던진 옷을 비단에 묶어 교의(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왕의 죽음을 사직과 종묘에 고하는 고사묘를 했다. 

5일째 되는 날 시신에 90겹의 옷을 더 두르고 이불을 감싸 천으로 묶었다. 대관 안에 녹색과 붉은 비단을 붙인다. 바닥에 쌀을 태운 재를 펴고 칠성판을 깐다. 그 위에 요를 놓고 왕의 시신을 올려놓은 다음 이불을 덮고 관 뚜껑을 덮었다. 왕의 관을 재궁(梓宮)이라 부른다. 재궁을 넣은 큰 상자인 찬궁을 만든다. 대나무로 출입문을 내고 그 안에 다리가 없는 평상을 놓은 후 대자리와 요를 펼치고 재궁을 넣었다. 왕릉으로 옮길 때까지 재궁을 모시는 빈전(殯殿)을 설치한다. 일반인의 빈소와 같은 것이다.  

6일째 되는 날 세자, 왕대비, 왕자, 세자빈, 종친과 대신들이 상복을 입었다. 다음으로 왕위를 받는 의식을 행했다. 왕세자가 상복을 벗고 예복인 면복으로 갈아입은 후 재궁 앞에서 옥새와 유언장을 받았다. 왕세자는 궁궐의 정전에 나가 등극했다.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우리나라 왕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우리나라 왕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왕의 업적에 따라 종묘 이름, 업적 이름, 왕릉 이름 등을 정했다. 재궁에 ‘상’(上)자를 써서 위, 아래가 바뀌지 않도록 했다. 전왕의 시호를 새긴 도장인 시보와 시호를 적은 시책을 제작했다. 종묘에 전왕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허락해주길 조정에 청하고 빈전에 시책과 시보를 올렸다. 

산릉도감 담당자들과 풍수에 밝은 지관들을 여러 곳에 보내 왕릉을 지을 명당을 물색했다. 후보지로 거론된 곳을 여러 차례 거듭 살펴본 뒤 가장 좋은 곳을 왕릉으로 결정했다. 산릉도감에서 5000명의 인원을 동원해 능을 만들었다.  

태조 건원릉은 4개월 공사 기간에 인부 6000여명이 동원됐다. 세종의 모친 원경왕후의 헌릉은 총 1만4000여명이 징발됐고,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능 조성 공사 때에는 죽은 사람만 100명에 달한다.    

왕이 승하한 지 5개월 후, 발인하기 위해 빈전에 봉안된 찬궁을 열고 재궁을 꺼냈다. 발인하기 전, 빈전 문 앞에서 길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궁궐을 떠날 준비를 했다. 늦은 밤에 재궁을 실은 가마(대여·大輿)가 궁궐을 떠나 능지로 떠났다. 장례에 사용하는 물건, 부장품, 시책 등을 각각의 가마에 담아 행렬을 구성했다. 190명의 담배군이 국왕의 시신을 실은 상여를 메고 예비로 4명이 더해 194명이 한 조를 이뤄 운구하는 등 행렬의 인원이 2400여명에 이르렀다. 담배군은 국장 때 상여를 메는 군사를 말한다. 1800년에 있었던 정종의 국장 행렬을 그린 ‘발인반차도’에는 총 40면에 1440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다.  

대여가 왕릉에 도착하면 일단 왕릉 제향을 위해 만든 정자각 안에 재궁을 봉했다. 이후 대여에 재궁을 실어 왕이 묻힐 산릉에 올랐다. 왕이 묻힐 지하 석실에 농로를 이용해 재궁을 내렸다. 왕릉이 완성된 후에는 능지기 외에 수백 명을 배치해 왕의 안식처를 엄격하게 지켜나갔다.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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