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예쁜 백로를 기다리며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예쁜 백로를 기다리며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2.09.02 15:05
  • 호수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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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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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는 식물들에 중요한 전환점

광합성으로 얻은 에너지 

열매 여무는데 집중적으로 사용

날씨도 갑자기 서늘해짐을 느껴

이 절기의 규칙 영원히 유지되길

처서는 매년 8월 22일 혹은 23일이다. 좀 뭉뚱그려 말하면 양력 8월 말 즈음으로 보면 된다. 입추와 백로 사이에 껴 있는 절기로 24절기 중 열네 번째다. 보름마다 바뀌는 절기를 매번 셈하는 건 아니지만, 절기 중 이 처서는 우리에게 많이 중요한 시점이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독 안에 쌀이 줄어든다’, ‘처서 비에는 십리에 천석을 감한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결론적으로 8월 말부터 식물들은 열매를 살찌우는 데 온 힘을 다 한다. 그런데 이때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그해 농사가 망할 수밖에 없다. 

이 처서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걸 알려면 식물의 주기를 살펴봐야 한다. 식물은 햇살을 받은 후, 이걸 에너지로 만들어내는 생산자다. 전문용어로는 광합성작용이라고 하는데, 이건 인간을 포함한 동물 소비자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기상으로 보면 생산자인 이 식물들은 광합성을 통해 처음엔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성장시키고, 꽃을 피우게 하는데 쓰고, 바로 이 처서를 기점으로 매우 획기적인 전환을 한다. 바로 이 에너지를 더 이상 잎과 줄기를 성장시키는데 쓰지 않고, 대신 맺은 열매가 잘 여물 수 있도록 집중한다.  

이 상황이 정원에서라면 어떻게 나타날까? 우선 왕성하게 자라던 잡초가 더이상은 세력을 뻗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풀 베는 일을 이제 멈추거나 덜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직 한가위가 멀었는데도 처서가 지나면 묘의 벌초를 해도 된다. 

또한 잎의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초록의 힘도 사라져 점점 누렇게 붉게 변하는 것도 이 시점부터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물이 처서 이후에 광합성작용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 생산 에너지를 오로지 씨앗과 열매를 살찌우는 데 쓰기 때문에 곡식이 익어가고, 과실수엔 열매가 하루가 다르게 커진다. 그러니 처서 이후에 비가 내리면 농사가 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마을은 논으로 에워싸여져 있다. 이 논의 벼들이 처서를 지나자마자 누렇게 벼가 여무는 게 보인다. 참 신기할 뿐이다. 뿐만아니다. 처서를 지나자마자, 마치 스위치를 켜기라도 한 것처럼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선선해졌고, 설악산을 넘어오는 북서풍의 바람에 한밤중엔 이불을 찾는 중이다. 

여름 내내 습기가 차도 열기 탓에 불을 땔 수 없었던 아궁이 방에도 이제는 남편이 불을 넣고 있다. 절기가 이렇게 기가 막히게 맞는 건 지구가 태양을 도는 각도와 항로가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누구나 걱정을 한다. 언제까지 이 지구가 지금까지 지켜온 이 정확한 규칙들을 계속해서 지켜줄 것인가?

올해 유난히 이 지구의 날씨는 요동을 쳤다. 사막이었던 곳에 폭우가 내리고, 물이 넘치던 곳엔 물이 말라 600년 전 유물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50년 만의 폭우로 도시가 물에 잠기는 일도 벌어지고, 이제 그쳐야 할 비가 처서 이후에도 여러 곳에 비를 내리는 중이다. 

지구가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많은 이들이 힘주어 외치고, 또 외쳐도 외면했던 결과가 이제 슬슬 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코로나로 심하게 충격을 받았던 우리지만 어느덧 이조차도 무던해지는 느낌이다. 자연이 주는 이 수많은 경고를 계속 무시하며, 우린 정말 무사히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올해 처서가 지나며 날이 서늘해지니, 마음 한쪽에서는 안도감이 든다. 이제 처서를 지나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9월 8일에 찾아올 것이다. 이 지구의 규칙이 앞으로 영원히 어김없이 예쁘게 찾아와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려면 지금 우리 개개인은 뭐라도 이 지구를 위해 할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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