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 없다”는 문제적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 없다”는 문제적 작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2.10.17 14:06
  • 호수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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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장롱’으로 등단… 20편 중 국내에도 다수 소개

불륜을 다룬 ‘단순한 열정’도 연하 외교관과 자신의 실제 경험 이야기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82)는 1991년 발표한 ‘부끄러움’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실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려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설화 한 작품이다. 에르노가 40여년 간 발표한 20편 작품이 대부분 자전적 고백이며, 낙태, 실연, 질투 같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을 그대로 드러냈다. 자신과 주변 이야기를 너무나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한 그의 소설들은 다소 불편하다는 비판과 함께 종종 논란에 섰다. 그리고 그녀의 이 독특한 글쓰기는 올해 노벨문학상의 선택을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월 6일 에르노를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라고 소개하며 “젠더, 언어, 계급적 측면에서 첨예한 불균형으로 점철된 삶을 다각도에서 지속적으로 고찰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40년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난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도시 이브토에서 성장했다. 루앙대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직생활을 거쳐 문학 교수가 돼 1977년부터 2000년까지 프랑스 국립 원격교육원(CNED) 교단에 섰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장롱’으로 등단했고 1984년 ‘자전적·전기적·사회학적 글’이라 명명된 작품 ‘자리’로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2011년 자전 소설과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는 프랑스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되는 쾌거를 이뤘다. 갈리마르는 프랑스 문학 거장들의 작품이 주로 묶인 시리즈로, 생존 작가가 편입된 것은 에르노가 처음이었다. 2003년 발두아즈주(州)에선 작가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국내에는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카사노바 호텔’ 등 20여 권이 번역 출간돼 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에르노 문학의 핵심은 자전적 글쓰기다.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아래 성장했던 유년 시절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한 사건이 ‘부끄러움’의 소재가 됐듯 이 시기 그녀가 체험하며 깨달은 불평등은 그녀의 문학 기반이 됐다.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단순한 열정’(문학동네)은 동구권 외교관인 연하의 유부남과의 불륜을 회고하는 40대 여성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에르노 자신이 경험한 불륜 체험을 다룬 소설로 발표 당시 프랑스 문단과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단순한 열정’ 출간 10년 후인 2001년에는 1988년 9월~1990년 4월 쓴 일기를 모은 ‘탐닉’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도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던 열세 살 연하 남성과 나눈 밀회의 기록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2000년에 발표한 ‘사건’(민음사) 역시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다. 프랑스가 낙태를 법으로 금지했던 1960년대에 작가가 스스로 목숨을 걸고 시도했던 임신중절 경험을 풀어내 발간 당시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레벤느망’의 원작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민음사)은 에르노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글쓰기와 문체를 선보인 독특한 작품이다. 그녀의 불운하고 이중적이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부엌에서 몸을 씻고 변소를 청소하며 살았던 그녀는 학업으로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며 자신의 가족과 거리를 둔다. 이 작품은 명문고에 진학한 ‘안’이란 여고생을 통해 ‘여성’과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자신의 조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열림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죽음 가까이에서 쓴 소설이다. 유년 시절부터 마음 깊이 미워하면서도 끝내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다. 여성으로서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 결국 자신의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을 담담히 고백한다.

죽음에 대한 그녀의 탐구는 ‘다른 딸’(1984Books)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품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에르노가 편지를 보낸 이는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다. 자신이 세상의 우주이자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에르노는 자신의 출생 이전에 같은 성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불안과 혼란을 경험한다. 부재와 존재라는 주제 의식을 담아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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