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멤버’, 치매 앓는 80대 노인의 친일 청산 위한 복수극
영화 ‘리멤버’, 치매 앓는 80대 노인의 친일 청산 위한 복수극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2.10.31 13:45
  • 호수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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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80대 치매 노인이 자신의 가족을 핍박했던 친일파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번 작품은 80대 치매 노인이 자신의 가족을 핍박했던 친일파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아내 죽음 계기로 60년간의 계획 실행하는 내용… 이성민‧남주혁 호연

친일파 처단의 통쾌함과 함께 사적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 던져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속도감을 즐기는 운전자들이 한 번쯤은 몰고 싶어하는 빨간 스포츠카가 스크린 위를 내달린다. 놀랍게도 차의 운전자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80대 노인이다. 그러나 차의 질주는 오래가지 못한다. 갑자기 중앙선을 넘은 차는 모래 더미를 박고 멈춰 선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노인, ‘필주’(이성민 분)는 읖조린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고.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이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실행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 ‘리멤버’가 10월 26일 개봉했다. 독일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2015)가 원작으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족을 몰살한 나치 군인을 향해 복수하는 설정을 한국 역사에 맞게 바꿨다. 2년 전 촬영을 마쳤으나, 코로나19 여파로 개봉이 미뤄졌다.

차 사고 이후 영화 배경은 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바뀐다. 뇌종양 말기, 알츠하이머까지 앓고 있는 필주는 이 패밀리 레스토랑의 최고령 직원으로서 늘 밝게 사람들을 대한다. 또 같이 일하는 20대 청년 ‘인규’(남주혁 분)와 서로를 ‘프레디’와 ‘제이슨’이라 스스럼없이 부를 정도로 소통도 잘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필주의 평생 동반자인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그는 스스로를 더 잊어버리기 전에 60년 동안 품었던 일을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가족들을 죽게 만든 원수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친일로 호의호식했던 그의 원수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사가 됐다. 이들은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설파하고, 위안부와 강제징용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며, 우리의 진짜 적은 미사일 쏘는 쪽이라고 주장한다. 친일파라는 손가락질에는 ‘그때는 그냥 그 시절을 살아남으려 했을 뿐’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필주는 이런 원수들을 한 명씩 찾아 제거하려 한다. 혹시라도 기억을 잃을까,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또 아무것도 모르는 인규에게 슈퍼카 운전대를 넘기며 일주일 동안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절친의 부탁과 수고비를 받고, 슈퍼카를 몰아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필주를 따라나선 인규는 첫 복수 현장의 CCTV에 노출돼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 일로 필주의 계획을 알아채고 자신마저 위험에 처하지만 아버지 수술비 마련을 위해 결국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이번 작품은 기억을 잃어가고 죽음을 앞둔 노인이 친일파들에게 반세기 넘게 계획한 복수를 실행한다는 신선한 설정을 앞세운다.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는 필주는 베트남전을 거친 베테랑 군인 출신으로 그려 사실성을 높였다. 

그의 복수대상들은 친일 행적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육군참모총장, 대기업 회장, 명망 있는  학자가 됐다. 이번 작품은 필주의 복수를 통해 우리의 역사가 미처 단죄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호의호식하는 친일파의 망령을 영화적으로 처단하면서 통쾌함마저 선사한다. 

반면 ‘국가가 바로잡지 못한 문제를 사적으로 해결해도 되는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필주의 행보는 과거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안두희를 떠올리게 한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했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돼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며 호의호식했다. 하지만 암살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결국 1996년 자신의 자택에서 박 모 씨에게 피살됐다. 이때 박 씨가 안두희를 죽일 때 사용한 둔기에 ‘정의봉’이라 적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두희의 암살을 두고 속시원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사적 복수는 허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팽팽했다. 

무엇보다 이성민의 호연이 빛난다. 80대 노인을 연기한 그는 말투부터 걸음걸이, 자세까지 노인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하느라 촬영 중반부부터는 목 디스크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또 그가 선보이는 노인 액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상대를 제압하는 강인한 눈빛으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인규 역의 남주혁 역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의도치 않게 동행하게 된 인규의 고뇌를 통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전달한다. 또 두 사람의 세대를 뛰어넘는 교감으로 남다른 브로맨스를 형성하며 작품의 재미를 높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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