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8] 시기심에 왕릉 옮긴 문정왕후 “남편이 전 부인과 같은 묘에 누워 있는 꼴 못 봐”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8] 시기심에 왕릉 옮긴 문정왕후 “남편이 전 부인과 같은 묘에 누워 있는 꼴 못 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1.07 13:38
  • 호수 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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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가 묻힌 서울 공릉동의 태릉. 국정을 주물렀던 그녀답게 능의 이름도 클 태(泰)자를 썼다.
문정왕후가 묻힌 서울 공릉동의 태릉. 국정을 주물렀던 그녀답게 능의 이름도 클 태(泰)자를 썼다.

중종과 둘째 부인 장경왕후, 고양시 덕양구 정릉에 안장

셋째 부인 문정왕후 못 보겠다며 아들 명종 시켜 천릉(遷陵) 

결국 세 사람 서울 강남, 공릉동, 경기 고양시에 따로 묻혀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왕릉을 옮길 정도로 시기심이 많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년). 그녀는 조선 전기 11대 중종(中宗· 1488~1544년)의 왕비이자 13대 명종(明宗1534~1567년)의 어머니이다. 1517년에 왕비에 책봉됐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기도 했다. 

1559년 4월 23일, 명종은 빈청에 모인 대신과 예조 관원에게 중종의 능을 옮기겠다고 전교했다. 중종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와 함께 경기 고양시에 있는 정릉에 안장돼 있었다. 

명종은 이장의 이유로 그 땅은 처음부터 불길하다는 의논이 분분했고, 세조가 직접 가서 보고는 ‘좋은 땅이 아니므로 쓸 수가 없다’라고 했던 사실을 들었다.

이 자리에 있던 영의정 상진은 “풍수설은 헛된 것이고 능을 옮기는 일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더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청했다. 하지만 명종은 “예로부터 능을 옮기는 일이 없지 않았으며, 고양의 능 자리가 전에도 여러 차례 거론됐는데도 오랫동안 쓰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 풍수설을 믿기 어렵다 해 길흉을 가리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고집했다. 그러고는 길지를 정하고 길일을 택해 아뢰라고 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사간원에선 천릉(遷陵)하라는 명을 취소하길 청했다. ‘명종실록’에 당시 일이 기록돼 있다. 

“주상께서 선왕의 능침이 있는 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여겨서 능침을 옮겨 선왕을 편안히 모시는 도리를 다하려 하시니 신민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능침의 위치를 그곳으로 정해 영원한 안택을 만든 지 15년이 됐습니다. 하늘에 계신 혼령이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오르내리시는데 하루아침에 능침의 위치를 다시 정하면 도리어 옮겨 모시는 와중에 불편하게 여기실까 염려됩니다.(중략)다시 생각하시어 능침의 위치를 바꾸어 정하라는 명을 취소하소서.”

명종은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1562년 8월 22일 중종의 능을 부왕 성종이 안장된 서울 강남의 봉은사 근처 선릉 옆으로 옮겨 모셨다. 그런데 중종의 능을 옮기자는 건 명종의 뜻이 아니었다. 바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질투심 때문이다. ‘명종실록’은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비마마는 중종이 장경왕후와 같은 묘에 있는 것을 꺼려서 강압적으로 명하여 능침을 옮기고 죽은 후에 중종과 같은 묘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망한 중 보우가 밖에서 꼬드기고 간신 윤원형이 안에서 성사시켜 선왕이 15년 동안 편안히 계시던 능침을 함부로 옮기려 했다.(중략)당초 헌릉 부근에 있던 장경왕후의 능을 고양으로 옮길 적에 관을 바꾸고 염습을 다시 했는데 그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의복이 옥체에 딱 달라붙어 대꼬챙이를 써서 겨우 떼어냈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장경왕후가 같은 묘에 있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억지로 떼어놓았다는 것이 실록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중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왕비를 가장 많이 둔 왕 중 하나이다. 단경왕후부터 숙원 이씨까지 무려 12명이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로 연산군 때 권신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 됐다. 중종은 단경왕후를 사랑했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심해 어쩌지를 못했다.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로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아들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세자가 졸지에 친모를 여위자 양육할 존재가 필요했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의 가문에서 17세 된 처녀를 왕비 후보로 밀었다. 그가 바로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는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교육에서 배제돼 있던 여성들과 달리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으로부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비록 왕비였으나 나이 많은 후궁들의 등쌀에다 줄줄이 딸만 넷을 낳아 기를 펴지 못했다. 자기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의 신세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세자의 보모’라는 보호막 뒤에서 근근이 살았다. 그러다 30대 후반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이다.

왕세자가 생기자 과거 보호막이었던 인종이 눈에 거슬렸다. 야사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세자(인종)를 죽이기 위해 세자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한 세자를 독한 말로 구박해 병들게 하고, 때로는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끈질긴 독살 위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종은 29세 되던 해, 재위 8개월만인 1545년 7월에 사망했다. 인종의 사인과 관련해 문정왕후가 건네준 떡을 먹다 목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정왕후는 자기의 소원을 성취했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중종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정릉(靖陵)에 묻혔다. 장경왕후는 경기도 덕양구의 서삼릉에 묻혔고, 문정왕후는 서울 공릉동의 태릉에 묻혔다. 결국 세 사람은 각각 떨어져 단릉의 형태로 묻혀 있다.

조선시대 정릉은 한강 물이 불어나면 능의 입구인 홍살문까지 침수돼 제물을 수송하기 위해 정자각까지 작은 배를 타고 왕래한 경우가 많았다. 길지라고 택한 장소가 상습 침수지역인 셈이다. 명종 18년에 순회세자가 죽고, 이어 명종 20년 문정왕후도 64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천릉에 대한 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문정왕후는 의붓아들을 죽이고 정권을 휘두른 ‘악후’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 전기 불화 120여점이 열렬한 불교신자였던 그녀의 불심에 의해 발원됐다는 점에선 일말 다행스럽기도 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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