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성균관 유생 시절의 조광조 답안지에 매료
“군주 홀로 정치 못해… 대신들에게 정치 맡겨야”
너무 앞서가던 조광조, 기묘사화로 38세에 사약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년)와 중종(中宗·조선 11대 왕·1488~1544년)은 애증이 교차한 관계였다. 중종은 조광조의 실력에 매료돼 그를 주요 직책에 등용했으나 후에는 사약을 내려 죽음으로 내몰았다. 과연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나.
조광조는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신진사대부의 대표적 인물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였다. 사람들은 공부에 몰두하는 조광조를 보고 ‘광인’, ‘화태(禍胎·재앙의 근원)’라 말하기도 했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권문세족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한 정치세력으로 조선 건국의 주역이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됐다. 종이 제조 관련 부서로 종6품에 해당한다.
그는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했다. 성리학 보급의 하나로 마을(향촌)마다 향약(향촌 자치규약)을 보급하고, 과거시험은 사람의 행실을 알 수 없고 글재주로만 인재를 뽑는다고 여겨 인재 추천제도 ‘현량과’(천거제)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하도록 했다.
어느 날 중종은 성균관을 방문해 유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냈는데 거기서 조광조의 답안지에 매료됐다.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왕권이 허약해 유생들에게 정치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갔던 것이다. 중종이 낸 문제는 ‘공자 시대의 이상 정치를 현재에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중종은 “공자는 ‘만일 누가 나에게 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한다면 1년이면 그런대로 실적을 낼 것이고 3년이면 정치적 이상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다. 그 방법을 하나하나 지적해 말해보라”고 했다.
조광조는 거침없이 답안지를 써내려갔다. 먼저 중종이 낸 책문의 핵심인 공자의 도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다.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고 공자의 마음이 바로 천지의 마음입니다. 천지의 도와 만물의 많음이 이 도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천지의 마음과 음양의 감화 또한 이 마음에 말미암아 조화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음양이 조화되어 만물이 이루어진 뒤로 일물(一物)이라도 그 사이에서 성취되지 않음이 없고 반듯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하물며 공자께서는 본디 있는 도로써 이끌었기 때문에 쉽게 효과를 얻었고, 본디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써 감화시켰기 때문에 쉽게 효과를 얻은 것입니다.”
이어 답안지에 ‘먼저 법도와 기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제한 후 ‘원칙이 세워지면 대신들에게 정치 실무를 위임해야 한다’고 썼다.
“법도와 기강의 큰 줄기를 세웠다면 이제는 대신에게 정권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군주가 홀로 정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대신에게 맡겨야 정치의 법도가 확립됩니다. 군주는 하늘과 같으며 신하는 사계절과 같습니다. 하늘이 혼자 돌기만 하고 사계절의 운행이 없으면 만물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군주가 혼자 책임을 지고 대신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온갖 교화가 흥기하지 않습니다. 흥기하지 않고 완수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늘이 혼자 운행하고 군주가 혼자 책임을 지면 하늘이 되고 군주가 되는 도를 크게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스러운 군주와 현명한 재상은 반드시 성실한 뜻으로 서로 믿고 모두 그 도리를 다하여 함께 정대하고 광명한 업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우선 대신을 공경하고 정치를 맡겨 기강을 정립하고 법도를 정립하신 다음 훗날 대본을 수립하고 큰 법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조광조가 이 답안지를 썼을 때가 33세로 학문의 수준과 열정이 절정에 달했다. 조광조는 왕의 수신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엎드려 바라건데 전하께서는 도를 밝히는 것과 혼자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을 마음 다스리는 요체로 삼고 그 도를 조정에 세우셔야 합니다. 그런즉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설 것이며 법도도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공자가 ‘석달이면 가하고 3년이면 성취할 수 있다’고 한 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임금님의 위엄을 무릅쓰고 감격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며 삼가 죽기를 각오하고 대답합니다.”
조광조의 답안지에 강한 인상을 받은 중종은 이 일을 계기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자신의 핵심 참모로 삼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신하란 왕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며 넘으면 안 될 선을 넘었다.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지 않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들을 가려내 78명을 공신록에서 지워 버리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4대 사화 중 하나이다.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막장의 극을 달리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이 일로 남곤 등 당시 훈구 세력들은 조광조에게 앙심을 품었다. 훈구 세력들은 중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를 움직였다. 그들은 희빈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그것을 벌레가 먹게 했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되는데,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중종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였다.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사약을 받고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해가 기묘년이라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한다.
조광조의 도덕·이상적 정치 구현의 꿈은 4년여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중종은 조광조가 젊은 혈기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앞세워 왕권을 압박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때는 그런 점이 둘 사이를 가깝게 했으나 바로 그런 부분으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현주 기자
헌법(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 대일선전포고),국제법, 교과서(국사,세계사)를 기준으로, 일제강점기 잔재를 청산하고자하는 교육.종교에 관심가진 독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