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슬픔을 노트에 써라 그리고 당신의 감정을 포용하라!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슬픔을 노트에 써라 그리고 당신의 감정을 포용하라!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2.11.28 11:27
  • 호수 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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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가족‧지인을 잃은 슬픔, 상처…

초연한 척 덮어만 두지 말고

차분히 글로 써내려가 보라

솔직한 감정과 만나 껴안아주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남을 경험

10월의 마지막 주는 내 친구의 슬픈 문자 메시지로 시작됐다. ‘남동생 딸이 갑자기 하늘나라 갔어. 시집도 안 간 36살 조카인데 밤에 자다가 심장마비로. 아침 일찍 슬픈 얘기 보내 미안해’  

장례식을 마치고 친구는 가눌 수 없는 슬픈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딱히 위로의 말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떠난 사람의 불쌍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그 부모님과 그 동생은, 또 친구들은 어떻게 사나. 그 애끓는 그리움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나. 

이후 몇 일 동안 그 충격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주말에 이태원 골목길에서 할로윈 데이에 나온 젊은이들 150여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막힌 공간도 아닌 거리에서. 

며칠이 지나도록 무거운 슬픔이 가슴을 짓눌러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망연자실한 시간이 지날 뿐이었다. 보름이 넘도록 이태원 참사는 잊혀지기는 커녕, 더욱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따지는 일로 언론은 날마다 넘쳤고, 무분별한 개인 방송자들은 처참한 장면들을 여과없이 내보내기도 했다. 무언가 책임있게 행동해 주어야 하는 정치인들은 서로 힐책하기에 바쁘다. 

모두 상처를 입었다. 오래전 큰 사고를 당했던 사람은 그 때의 트라우마로 다시 괴로워했고, 어떤 이유에서건 자녀를 잃고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은 그 상처가 다시 살아나 죽도록 아파했다.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았으니 날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때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 회복됐다는 듯 살아가지만 그 마음속엔 정말 어쩔 수 없는 암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병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사회의 질환이다. 전쟁과 참사, 전염병과 경제적인 고난이 만들어내는 대량 고통이다. 국가적인, 사회적인 치료가 필요하지만 우선 개개인도 상처를 덮어만 두지만 말고 서로 보듬고 손을 붙잡아 주어 치유의 방법을 나누어야 할 때이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만연한 우울하고 슬픈 감정은 속으로 꾹꾹 담아두기보다 혹은 겉으로 폭발해 내기보다, 차분히 글로 써 내려갈 때 놀라운 치료가 된다고 한다.

하버드대 메디컬스쿨의 심리학자 수잔 데이비드는 그녀의 테드(TED) 강연에서 내면세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어려운 시간에 버틸 힘이 생긴다는 ‘감정적 포용’(Emotional Agility)에 대해 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그녀는 15살 때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슬픔도 괜찮은 척 살았다. 누가 어떠냐고 물으면 초연한 듯 ‘OK’라고 답했다. 마치 인내의 달인처럼 강인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다 했지만 괜찮은 게 아니었다. 가슴 속엔 용광로처럼 끓는 감정의 화로가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공책 한 권을 내밀며 그곳에 자신의 느낌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숨김없이 적어보길 권하셨다.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 써보는 것, 빈 노트에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으로 수잔 데이비드는 회복됐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런 감정, 슬픔과 무기력함, 분노도 끝없이 적어가다 보면 이러한 감정과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 때 이 감정을 내치지 말고 모른 척 하지 말고 끌어 안아 주라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이라 하여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불안은 ‘의미있는 인생을 위한 입장료’ 같은 것이니, 상실과 후회도 마주하고 받아들이면 회복의 과정을 거쳐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수잔 데이비드는 위로한다. 이를 가리켜 ‘감정적 포용’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강연을 들으며 나는 15살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때 적어내려 갔던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출근길에 심근경색으로 가족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셨고, 이후 사춘기인 나는 엄마, 가족, 학교, 사회와 불협화음으로 쉽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 쏟아놓은 일기장은 나의 다양한 감정의 출구였고, 그 슬픔과 좌절, 고통의 감정분출을 통해 나는 회복되고 용기를 얻었다. 그것은 나의 감정을 포용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내 감정과 행동을 인정해 주고 방향을 잡아 주셨던 상담 선생님의 지도가 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떠난다. 그리고 남겨진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이별이 쉽지도,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이별의 시간과 가까워지는 나이라고 해서 죽음에 대해 대범해지거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죽음이 더 두렵고 공포는 커질 뿐이다. 

마치 뭐든지 견딜 수 있는 인내의 달인처럼 초연한 척하지 말고 내 안의 연약함을 돌보고 안아주는 솔직함이 나 자신에게도 또 서로에게도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가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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