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0] 조선의 내시 “임금 가까이서 업무 수행… 오늘날 대통령실 직원”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0] 조선의 내시 “임금 가까이서 업무 수행… 오늘날 대통령실 직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1.28 14:26
  • 호수 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궁궐 내 음식물 감독·왕명 전달·궐문 수비·청소 등 역할

고려의 환관, 왕과 대화할 정도로 학식 높고 무술 능해

김처선이란 내시, 연산군에 직언했다 혀 잘리는 극형에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영화 속 내시는 목소리와 외모가 정상인의 그것과 다르게 묘사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내시는 뭔가 부족한 인격체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된 편견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내시는 왕과 대화 상대로서 논어·대학을 공부했고 무술도 능했다고 한다. 양반집 자제가 내시를 지망하기도 했다. 이들은 물론 거세는 당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조선의 내시-즉 환관은 음낭을 제거했고 철저하게 왕의 시중만 들었다. 

경국대전은 내시의 역할을 ▷궁궐안의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비 ▷청소 등 크게 네 가지로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왕실의 재산관리, 궁중의 각종 공사, 지역의 실정 파악 등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내시는 엄연히 품계와 관직이 있는 전문직 공무원이었다. 이들은 임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온갖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실 직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려 때는 내시부 판사가 과거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조선에 와선 전부 환관으로 바꾸고 대신 정식으로 벼슬을 내렸다. 이는 궁궐의 잡일로 역할을 한정시켜 권력 남용이나 월권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위해서다.

승정원의 규찰을 받는 내시의 품계는 종2품인 상선에서 종9품인 상원까지 다양하게 구분돼 있다. 최고 직인 상선 내시의 경우는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수라상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내시가 정4품의 ‘대전내관’이라 불리는 상전이다. 

상전은 왕과 신하의 소통에서 중간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함부로 깔 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 왕에게 보고할 때 승정원을 거치는데 승정원에서 검토하고 바로 왕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승지가 상전에게 전달하면 상전이 왕에게 올리는 식이다. 승지는 왕명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는 승정원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자이다. 상전이 후계자 결정, 왕세자비 간택 등 궁궐의 중요 정보를 먼저 알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줄을 대 출세하거나 이권을 취하려는 신하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심지어 왕의 행차에서 말을 타고 왕을 수행하는 내시도 있었다.

궁궐 안에는 내시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인 내반원(內班院)이 있었다. 내반원은 내시의 업무 성격상 왕의 처소 근처에 있었다. ‘궁궐지’에 의거하면 그 위치는 경복궁에서는 경희문 서쪽, 경희궁에서는 홍정당 남쪽이다. 내시의 숫자는 경국대전에 140명으로 규정돼 있으나 왕의 뜻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내시의 근무형식은 장기간 궁궐에 머물면서 근무하는 장번내시와 교대로 궁궐을 출입하는 출입번내시가 있었다. 

내시의 월급은 궁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내시가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으며 일을 하지 않아도 국가에서 연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이조참판을 지낸 김종직(1431~1492년)은 성종의 전교를 받아 내반원의 연혁과 기능을 기록한 ‘내반원기’를 남겼다. 이는 내시들의 기강을 잡기 위한 것으로 김종직은 중국의 예를 들며 내시들의 행동거지를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만약 참소하고 아첨하여 임금을 유혹하고 비위를 맞추고 간사함으로써 은총을 받아서 자기 당류(黨類)를 끌어들이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시기하여 해치며 성색과 기교를 베풀고 재리를 긁어모으는 등 무릇 임금의 욕심을 맞추는 데 못 할 짓이 없는 경우에 있어서는 임금이 불행하여 한 번 그 마수에 빠져들기만 하면 환관의 지위를 빌려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방자하고 거만하여도 감히 막을 자가 없게 되어 눈 한 번 흘긴 혐의도 반드시 갚으려 하고 자기 본가의 족속들까지도 영화롭고 귀한 지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출척과 형상의 권한이 남몰래 그들에게로 옮겨져서 끝에는 국가가 위란하게 되고 자신의 몸이 칼날에 잘리게 되는 것이니 제나라의 수초부터 한·당·송의 여러 환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법칙인 것이다.”

연산군 때 간신(김자원)과 충신(김처선)을 대표하는 내시가 있었다. 나주 출신의 김자원은 김처선보다 품계는 낮지만 바로 위에서 언급한 상전이었기 때문에 위세가 셌다. 대신들은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왕을 대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벼슬이 올라가고 내려가 모두가 그를 치켜세우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김자원이 승정원을 출입할 때면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다고 전한다. 김자원의 처갓집 사람들까지 궁궐 곳곳에 들어가 김자원의 권세를 믿고 기고만장했다.

그에 반해 내시부의 총 책임자였던 김처선은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이 여느 날처럼 처용놀이를 하면서 음란하게 굴자 “이 늙은 신은 4대 임금을 섬겼습니다. 경서와 사서를 익혀 대강의 역사를 또한 압니다. 그렇지만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라고 직언했다. 연산군이 이에 격분해 김처선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다리와 혀를 자를 것을 명했다. 죽은 김처선의 부모 무덤까지 파헤치도록 했다.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백성은 개명했을 정도다. 중종반정 이후 김처선은 직간을 하는 충신으로 명예가 회복됐고, 영조 27년에 그의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한다.

궁궐을 나온 뒤 호사를 누린 내시들도 있었다. 전남 순천의 별량면 척동마을로 은퇴한 두 내시가 그들이다. 식읍으로 받은 땅이 많아 낙안 일대의 많은 토지가 두 사람의 소유였다. 마을사람 대부분이 그들 소유의 논에 소작을 했다. 흉년이 들면 내시들의 집 대문 앞에 쌀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부임하는 낙안군수도 말에서 내려 두 내시에게 인사를 했다고 전한다. 

이런 내시 제도는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숫자를 서서히 줄이다가 1894년에 시작된 갑오개혁 때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