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1] 조선의 어느 모녀 간통 사건 “상대는 남편 조카…행실이 더욱 추악할 뿐이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1] 조선의 어느 모녀 간통 사건 “상대는 남편 조카…행실이 더욱 추악할 뿐이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2.05 13:57
  • 호수 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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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풍속도.
조선시대 성풍속도.

딸은 남편의 친척 동생과, 어미는 남편의 친조카와 각각 불륜

성종 “증거가 없으니 덮자” vs 승정원 “풍속 해치니 벌하자”  

남편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딸의 방에 어미가 남자 들여보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오늘날과 같은 성 개방시대에도 이 같은 일은 흔치 않다. 하물며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데다 엄격한 윤리 행동을 요구하는 조선시대에 엄마와 딸이 간통을 저질렀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1489년 7월 25일, 사헌부는 성종(조선 9대 왕·1457~1494년)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전주사람 정은부의 아내 정학비가 남편의 친척 동생 하치성과 간통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다 실토를 했습니다. 다만 정은부의 장모 공씨가 남편의 친조카 정윤례와 간통한 일은 이웃 사람이 ‘공씨가 남편 정미가 죽은 뒤에 정윤례를 불러 자기 집에 재워서 사람들이 모두 의심한다’라고 말한 것 말고는 별다른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친속이 죄를 지었을 때 숨겨준 경우는 죄를 논하지 않는다는 법에 구애받지 말고 노비와 일족들을 형장을 치며 신문하게 하소서.”

한 집안에서 모녀가 일으킨 간통사건에 대해 왕에게 직보한 것이다. 딸 정학비는 남편의 친척 동생 하치성과, 어미인 공씨는 남편의 조카 정윤례와 정을 통했다는 것인데, 딸은 시인을 했으나 어미는 시인을 하지 않고 있고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 주변인물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실토하게 하자는 얘기이다. 당시는 죄인의 가족이나 친척, 노비 등이 죄인의 범행을 숨기고 말하지 않아도 처벌하지 않도록 한 법이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성종은 사헌부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성종은 “백성은 원래 누군가 그럴싸한 말을 한마디 하면 여러 사람이 그대로 호응해 똑같은 말을 하는 법”이라며 “이번 일은 10여 년 동안 밝히기 어려웠던 일인데 대뜸 형장을 치려고 한다면 진술에 이름이 언급돼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자가 분명 많아 화기를 해칠 듯하다. 내 생각에는 신문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풍속을 바로잡을 책임을 가진 사헌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헌부 장령 안윤손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공씨가 간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사회윤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조사는 계속하되, 마을 사람들이나 상례를 도운 일족들만으로 그 대상을 한정해 법을 어기지 않고도 조사가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날 논의는 여기서 일단 마무리됐다.

8월 1일, 성종이 다시 이 문제를 꺼내 들면서 “정학비는 이미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으니 법률에 의거해 처벌해야겠지만 공씨는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이번에는 승정원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공씨의 일은 풍속에 관련된 중대한 사건인 데다 간통한 자가 남편의 조카이니 행실이 더더욱 추악합니다. 보통 양반 가문에 이런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이 쉽게 들통 나지 않는 법입니다. 들통이 났는데도 신문하지 않으면 어떻게 악행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성종실록).”

그러자 성종도 마음을 돌려 조사를 계속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8월 17일 성종실록에는 공씨가 이미 사망해 조사를 중지하라는 성종의 전교가 기록돼 있다. 공씨의 사망으로 공씨의 간통 혐의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신 사관은 8월 1일 실록 끝에 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공씨가 남편의 상을 치를 때 무당을 불러들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실무를 주관하던 남편의 조카 정윤례가 밤을 기다려 그 무당과 음란한 짓을 했다. 공씨가 밖에서 이를 엿보다가 자못 마음이 동해 결국 정윤례와 남몰래 정을 통한 것이다. 한편 공씨의 사위 정은부가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가서 그의 처 정씨가 홀로 살고 있었다. 공씨가 정은부의 조카 하치성을 정씨의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젊은 여자가 혼자 자니 가위에 눌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후에 정은부가 변방에서 돌아와 자신의 부모를 찾아뵙고 나서 처를 그리워하며 “먹고 자는 것은 어떠 하려나?” 하니, 동생이 곁에서 슬며시 웃으면서 “형 혼자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확인해 보면 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은부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려서 다그쳐 물어봤지만 동생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 보라고만 할 뿐이었다. 정은부는 그날 밤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침실로 곧장 들어갔다가 자기 처가 하치성과 함께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공씨가 이를 듣고 “젊은 남녀가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어찌 무턱대고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는가?”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들통 나게 돼 조사가 이루어져 정은부의 처는 강계부로 유배됐다. 뒤에 정은부가 종군하여 강계부에서 수자리를 살게 됐다. 정씨가 명주 적삼을 보내며 만나자고 부탁했지만 정은부는 거절했다(성종실록 20년 8월 1일).”

공씨의 간통 전모도 자세히 언급돼 있다. 결국 공씨의 간통 소문은 사실이었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왕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정은부의 아내 즉, 공씨의 딸이 간통을 저지른 것도 공씨 때문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젊은 나이의 딸이 가여워서(?) 공씨가 젊은 남자를 딸의 방으로 들여보냈으니 오늘날의 성 풍속으로 봐서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530여년 전 버젓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법률서(대명률)에 근거해 간통죄를 다스렸다. ‘대명률’에 보면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합의 하에 간음한 경우 장 80대를 치되, 남편이 있는 여자는 장 90대를 치며, 여자를 속여 간음한 자는 장 100대를 친다고 돼 있다. 강간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며, 강간 미수자는 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떨어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낸다고 명시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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