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스테인리스 믹서와 도자기 믹서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스테인리스 믹서와 도자기 믹서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2.12.12 11:27
  • 호수 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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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같이 살아가야 하는 남성과 여성

역할이나 특성에서 많은 차이

성범죄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

평생 정신적 상처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의 고통 알고는 있는지

족히 20년은 지난 일이다. 나름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된 초등학교 동창 친구와 잘 나가는 산부인과 원장인 의사와의 맞선 자리.

“예뻐요?”, “예쁘죠. 일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며칠 전엔 아시아 총판 담당자가 되었다네요.”, “어떤 형이에요? 강아지 형? 아니면 고양이 형?”, “강아지 닮은 고양이 형이에요. 성격도 좋아서 주위에 사람이 많아요.”, “키는요? 체격은? 난 마른 체형은 싫은데.

이혼하고 20년을 씩씩하게 잘 살던 친구가 외롭다고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어렵게 마련한 소개팅 자리. 질문이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외모에만 관심을 두던 남자와는 달리 성격, 가정환경, 자녀 유무, 재산상태,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세세하게 캐묻던 친구.

두 번인가 만나다가 그들의 만남은 깨어졌지만 난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남자와 여자란 관심사와 생각, 감각기관도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믹서라는 기계로 비교를 해보자. 무지막지하게 크고 단단한 스테인리스로 만든 믹서가 남성이라고 한다면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금방 망가지고 깨지기 쉬운 뽀얗고 반질거리는 도자기로 만든 믹서는 여성이다.

메뉴가 단순한 기계이지만 여간해서는 망가지지도 않고 뭐든지 금방 후딱 잘 갈아주는 ‘스테인리스 믹서’. 도자기 특성상 쉽게 더럽혀지고 깨지기는 쉽지만 갈기, 다지기, 채썰기, 회오리 썰기까지 만능으로 다 해주는 ‘도자기 믹서’.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훌륭한 믹서라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역할과 특성이 달라 용도만 다를 뿐 가격도 비슷하다. 남성과 여성, 어쨌거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잘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어떨 때 더 아프고 슬픈지 이해하면 살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수많은 사건 사고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성에 관한 사건들. 성희롱, 성폭력, 성폭행. 성착취 등은 성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수치심을 주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행하고 폭행, 협박 따위로 강간을 하거나 성을 통해 강제로 이익을 취하거나 하는 것들이다. 

과거 여성단체에서 활동할 당시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중 한 여성이 울며 털어놓은 이야기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30대 후반의 여성이었는데 그 일을 당한 이후로 십 년이 넘도록 연애는커녕 남자와는 일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강간(성폭행)을 한 가해자가 꽁지머리를 했는데 세월이 흘렀어도 꽁지머리만 보면 구석에 가서 벌벌 떨며 숨어버린단다.

아마 그 꽁지머리는 지금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칼로 피가 나게 상처를 낸 것도 아니고 발로 짓밟아 뼈를 부러뜨린 것도 아닌데, 설마 그까짓 것 가지고 평생 힘들다고 엄살 부리냐고. 처음엔 내숭 떠느라 저항했어도 나중엔 같이 즐긴 것이 아니었겠냐고. 이것이 바로 스테인리스 믹서와 도자기 믹서의 차이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나는 외상은 햇볕에 소독하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꾸덕꾸덕 상처 부위를 말려주면 곧 나을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상처는 아무리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다.

꽁지머리를 무서워하던 그 친구. 조심스레 연애를 시도해 보았지만 곧 포기를 했다는데 그 이유는 남자가 그녀에게 애정 표시를 하는 순간, 마치 구렁이가 침을 질질 흘리고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 몸을 감는 것 같아 소름이 돋더라는 것이다.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성폭행보다 치밀한 계획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돈벌이를 하는 성착취가 더 악랄하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채로 끌려가는 성착취범. 포르노 영화 찍듯이 뭐 그저 잠깐 포르노 배우 역할을 좀 시켰을 뿐인데 뭐 그리 유난 떠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성착취 동영상에 나온 여성들은 어느 곳에서 그 누구를 만나던지 자기 혼자만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아 대인기피증을 앓으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데. 착취의 의미에는 동물의 젖이나 식물의 즙을 꼭 누르거나 비틀어 짜내는 행위란 뜻도 있다.

꽉 눌러 비틀어 짜내서 즙이란 즙은 모조리 빠져버린 인간. 과연 그녀가 온전히 자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성착취 범죄의 대상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강도 살인만이 중대 범죄가 아니다. 고의적으로 교묘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행을 저지르며 돈벌이를 하는 신종 성착취범들. 그들을 징벌적 처벌대상자로 여기고 ‘가석방 없는 징역 100년, 200년 등의 형량’을 내려서 애초에 그 범죄의 씨를 말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평생 사는 고통보다 정신적인 장애인으로 평생 살아가야 하는 삶이 훨씬 더 가혹하다는 것을. 메뉴가 달랑 두 개뿐인 ‘스테인리스 믹서기’는 이해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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