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2] 전쟁 중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 여자들 “환향녀의 정조 거론하는 자 엄벌에 처한다고 했으나…”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2] 전쟁 중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 여자들 “환향녀의 정조 거론하는 자 엄벌에 처한다고 했으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2.19 14:08
  • 호수 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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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 여인들이 몸을 씻었다는 서울 홍제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 여인들이 몸을 씻었다는 서울 홍제천.

병자호란 때 잡혀간 60만명 중 여성이 50만명

인조 “홍제원 냇물에 목욕하면 죄 묻지 않겠다”

사대부, 돌아온 아내 곁에 안 가고 첩 따로 둬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이는 수많은 부녀자를 영원히 다른 나라의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병자호란(1636~1637년)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던 조선의 여인들을 나라에서 모른 척 하면 한 맺힌 혼백이 타국의 저승을 떠돈다는 말이다.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1586~1647년)은 인조에게 이 같은 뜻을 글로 전하며 “여성들을 귀국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병자호란은 약 2개월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백성 60만명이 잡혀갔다. 그 중 50만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이들 여성을 환국시키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청나라는 돈을 받고 이들을 풀어주곤 했다. 일종의 몸값이다. 이 과정을 ‘속환’이라고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을 ‘속환가’라고 했다. 평민은 돈이 없어 고위 관료층이나 일부 부유층만이 가족을 속환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와서도 이들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다.

1638년 인조 16년에 신풍부원군 장유가 자신의 며느리 문제로 예조에 단자(單子)한 통을 올렸다. 

“신의 외아들 장선정의 처가 병자호란 때에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에 있습니다. 예전처럼 부부로서 함께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게 허락해주십시오.”

예조에서는 이 일을 판단하기가 난처했다. 그런 여성이 한둘이 아니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신하들의 의견도 첨부해 임금에게 보고했다. 신하들의 의견 중 하나가 서두에 언급한 최명길의 글이다.

최명길은 이 글에서 “신이 전에 심양을 갈 때 가족을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양반 가문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마자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부둥켜  안고 통곡하니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이 부족해 속환하러 가지 못한 부모나 남편들도 차차 가서 속환할 터인데 만일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면 분명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선 심양에서 들었던 여인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미모가 매우 빼어난 처녀 하나를 끌고 갔는데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죽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해 땅에 묻어주고 떠났습니다. 또 다른 여자는 약속한 값을 치르고 속환하기로 돼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어기고 값을 더 요구하자 못 돌아갈 것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겠습니까. 잡혀간 부녀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이렇게 일률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현실은 더 냉혹했다. 환속한 여성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던 사대부들은 새로 장가를 들었고, 다시 합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잡혀갔던 여인들을 비록 그들이 본심은 아니라지만 변고가 닥쳤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의를 잃었다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절대로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한때 많이 쓰였던 비속어 ‘화냥년’이 여기서 파생됐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이란 뜻의 환향녀(還鄕女)가 변해서 된 말이다. 환향녀가 낳은 아이를 ‘호로새끼’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인조는 “홍제원의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면서 “환향녀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했지만 이들에 대한 핍박은 그치지 않았다. 환향녀의 남편은 왕명 때문에 이혼은 못하더라도 첩을 두고 죽을 때까지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아내와 가족을 보호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온 아내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은 무능력한 조선의 남성들. 그 후예들은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주국방의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 환속과 관련해 눈에 띄는 역할을 한 이가 판중추부사(종일품)를 지낸 신계영(1577~1669년)이다. 그는 청나라와 협상을 통해 속환인 600여명을 데리고 왔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146인도 데리고 왔다. 

그가 남긴 시 중 지나간 젊음에 대한 미련과 늙음에 대해 탄식한 ‘탄로가’(歎老歌)가 있다. 수능 문제로도 출제된 이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주 인문학 여행을 맺는다.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센 머리 씽건 양자(찡그린 얼굴) 보니 다 죽어야 하이야//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소년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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