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⑧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⑧
  • 관리자
  • 승인 2009.06.12 09:56
  • 호수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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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창립 40주년] 기관지 ‘노인생활’을 발간하다
필자가 사무국장직에 취임하기 전의 일이다. 1974년 봄 어느 날, 노인회의 홍보담당 이사직을 맡아보고 있다는 최인호(崔仁浩)가 필자를 찾아와 ‘회지발간곅획서’라는 문건을 내밀며 한번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다. 4×6배판으로 200면 내외의 잡지를 월간으로 발간해 관계 관청이나 경로당 회원들에게 판매해 그 수입금은 중앙회 운영비로 충당하겠다는 것이 계획의 요지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경로당 수가 5000개소가 넘는데 1개 경로당에서 5부씩만 소화시켜 주어도 많은 이익이 날수 있어 중앙회는 운영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미 노인회에서는 발간하기로 승인이 났으니 총재보좌역인 필자가 편집에 관한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광고·인쇄 지인도움 약속…기관지 제작 결정

사업내용을 검토해 보았더니 모두가 주먹구구식이었다. 필자는 대한노인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회지발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발간에 소요되는 비용을 판매대금으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은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가며 그에게 설명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필자가 협력해 주지 않는 데 대해서 매우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필자의 설명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그 발간계획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필자는 사무국장 취임과 동시에 기관지 발간 계획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관지는 회세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자금 염출 방법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지난날 필자가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자유공론’에서 광고를 담당했던 이종훈(李宗勳)이 광고도 얻어오고 찬조금을 받아오기 위한 섭외활동을 해보겠다고 자청했다.

필자는 그가 섭외활동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믿고 기관지 발간업무를 시작했다. 필자가 기관지 발간을 결심한 또 하나의 동기는 새로 중앙회 이사로 영입한 이교헌(李校憲)이 명동에서 시사문화사라는 큰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용지만 대준다면 인쇄는 당분간 무료로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공산권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그 기관에서 나오는 출판물은 모두 그에게 맡겼던 것에 대한 보답 차원도 있었던 것 같다. 기관지의 명칭은 ‘老人生活’, 판형은 4×6배판, 두께는 60면 내외, 본문의 지질은 갱지, 본문활자는 10호와 12호를 병행해서 사용하고, 발간부수는 5000부, 3개월에 한 번씩 발간하는 계간지로 결정했다. 그리고 편집은 필자가 직접 담당하기로 하고, 문공부에 등록절차를 마쳤다.

1975년 10월 ‘노인생활’ 4X6 배판 창간호 발간

편집내용으로는 중앙회와 각 지방조직의 업무현황 소개 앞으로 노인회가 개발해 나가야할 프로그램 제시 정부와 지방의 노인관련 사업 소개 노인들 스스로가 취해야 할 자세와 역할 노인건강관리와 관련된 지식 그리고 서구사회 여러 나라 노인들의 생활 현황 소개 등 노인들의 읽을거리를 총망라한 종합지의 성격을 띠도록 했다. 임원들 중에는 이를 유가지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필자는 그것은 현실적으로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시켜 비매품으로 결정했다.

1975년 10웥, 드디어 창간호가 나와서 전국 각 지회와 경로당에 배포됨으로서 하부조직들로 하여금 중앙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음을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그때까지만해도 하부조직 중에는 중앙회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등 원성도 적지 않았다. 그 후 1980년 춘계호부터 노인생활지에 대한 정부보조를 받게 됨에 따라 판형은 국판, 그리고 종전까지 계간이었던 것을 월간으로 바꾸고, 외부 인사들의 원고도 게재하는 등 편집내용면에서도 많은 개선이 이뤄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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