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3] 손자 육아일기 ‘양아록’, “이가 나고, 혼자 일어서고…손자 커가는 걸 보니 늙는 걸 잊어”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3] 손자 육아일기 ‘양아록’, “이가 나고, 혼자 일어서고…손자 커가는 걸 보니 늙는 걸 잊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1.09 14:05
  • 호수 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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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록’의 표지와 글머리 내용.
‘양아록’의 표지와 글머리 내용.

조선 중기 문인 이문건, 58세부터 16년간 손주 성장 과정 기록

 말 안 듣는 손주 엉덩이 때리자 엎드려 울어…내 마음도 아파

“아이가 장성해 이를 보면 글로나마 할아버지 마음을 알 것”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날 때마다 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중략) 직접 일어나 나가서 데려와 정수리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어서 내 마음도 아팠다.”

조선시대 선비가 손주를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의 일부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놀기만 하자 체벌을 가했지만 우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얘기다. 

이 시대 육아는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는데 이처럼 남자가, 그것도 할아버지가 육아일기를 썼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주인공은 조선시대 승정원주서, 이조좌랑을 지낸 문신 이문건(李文楗·1494~1567년)이다. 

이문건은 51세 되던 해에 큰형의 아들 휘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그 연좌죄로 성주로 유배돼 그곳에서 2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삶을 마쳤다. 그는 안동 김씨 김언목의 딸과 결혼해 여러 명의 자식을 뒀으나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세상을 떴고 아들 온(熅)만 남았다. 온도 어려서 앓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온은 내리 딸만 낳다가 1551년 1월 5일 아들 숙길을 낳았다. 이문건은 58세에 대를 이을 손주를 얻고 매우 기뻐했다. 유일한 손주가 훌륭하게 자라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하면서 아이의 성장 과정을 기록해 책으로 남긴 것이 바로 ‘양아록’(養兒錄)이다. 

이문건은 손주가 태어난 날 기쁜 마음에 혼자 축배를 들기도 했다.

“천리는 생생하며 궁함이 없다더니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다. 선령이 지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뒤의 일들이 모두 잘 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에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펼쳐져 나 혼자 술을 따르며 경축을 한다.”

양아록은 아이가 출생 후 16세가 되던 1566년까지 성장 발달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기 형식의 시로 기록했다. 시는 모두 37제(題) 41수로 이루어져 있고 그밖에 산문 4편과 가족과 관련한 기록이 함께 실려 있다. 내용은 크게 성장과정을 묘사한 시, 질병 또는 사고와 관련한 시, 훈육 및 학습과 관련한 시 등으로 구분된다. 

이문건은 양아록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고자 하나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다.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하게 홀로 거처한다. 오직 손자 아이 노는 모습을 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장성해 이를 보면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이다.”

이문건은 손주의 이가 나고, 혼자서 앉게 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여섯 달 무렵 아이는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일곱 달에는 아랫니가 생겨 젖꼭지를 물었다. 9개월이 지나자 윗니가 생겼고, 11개월 때 처음 일어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다른 물건을 잡고 양발로 쪼그리고 앉았다. 한 달을 이렇게 하더니 점점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났다.” 

이 무렵 아이는 글을 읽는 할아버지의 흉내를 냈다. 이문건은 “손자가 커가는 것을 보니 내가 늙어가는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면서 손주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손주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밥 먹고 변을 볼 때도 할아버지만 찾았고, 할아버지가 외출하면 졸음을 참고 기다리다 반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결국 아이가 9세 되던 해 처음 손을 댔다.

이문건은 손자가 세살 때 학질을 앓았던 일도 상세히 적었다.

“계축년(1553년) 윤5월에 처음 앓기 시작해 27일 한열(寒熱)이 났다. 아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고통스러워하는데 처음에는 학질인지 알지 못하였다. 29일에 또 아프다고 했다. 4월 2일, 4일, 6일 모두 먼저 몸이 차가워지고 그 후에 열이 났다. 8일에 나무에 빌고 나서 좀 나아진 듯했지만, 다시 11일에서 16일까지 음식을 먹지 못했다. 17일 저녁부터는 곤히 자서 한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부터 병이 낫는 듯하다 끝내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몹시 야위어 측은했다.”

손주는 13세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 모두가 손주를 때리게 했다. 하지만 술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손자 아이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고 적었다.

이후에도 공부, 태도 등의 문제로 할아버지와 손주의 갈등이 커졌다.

이문건은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라고 반성의 빛을 보이면서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라고 쓴 뒤 집필을 끝냈다.

손주 숙길은 할아버지의 지극정성 덕에 탈 없이 성장해 43세까지 살았다. 이문건이 아들 온은 아버지보다 10년 일찍 3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숙길은 후에 양아록을 보고나선 사대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를 인정해 나라에서 포상을 하려 했으나 사양해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양아록은 자손교육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로 조선중기 양반 집안에서의 아동교육과 생활풍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거주하는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이문건은 조선시대 한글로 새긴 유일한 비인 ‘서울이윤탁 한글영비(보물)’를 쓴 이이기도 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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