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7] 한 잔 술이 필요한 순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7] 한 잔 술이 필요한 순간
  •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승인 2023.02.06 09:36
  • 호수 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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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술이 필요한 순간

술 생각 잊기 어려운 순간이 언제인가

남쪽 하늘에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지

잠시뿐이었구나 멀어진 저 꿈은

허무하구나 내 한평생이

울적하여 흉금을 터놓기도 고달프고

침통하여 자주 무릎을 끌어안고 한숨 쉬네

이때 술 한 잔이 없다면

흰머리가 그대로 생겨버릴 것

何處難忘酒(하처난망주)

蠻天風雨辰(만천풍우신)

浮休萬里夢(부휴만리몽)

寂寞百年身(적막백년신)

鬱鬱披襟倦(울울피금권)

沈沈抱膝頻(침침포슬빈)

此時無一盞(차시무일잔)

華髮坐來新(화발좌래신)

- 이행(李荇, 1478~1534), 『용재집(容齋集)』 6권, 「해도록(海島錄)」


이 시의 제목은 ‘何處難忘酒(하처난망주)’로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원조이다. 백거이는 술이 꼭 필요한 인생의 일곱 가지 순간을 포착하여 7수의 시를 지었는데, “술 생각 잊기 어려운 순간이 언제인가[何處難忘酒]”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이때 술 한 잔이 없다면[此時無一盞]~”으로 맺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문인들이 더러 이 시의 제목과 체제를 본떠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이행의 시를 소개해 본다. ‘용재(容齋)’라는 호로 잘 알려진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시 대가로 손꼽히는 분이다. 소개한 시는 거제도 유배 살이 때 지은 시를 모은 「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다.

이행은 어째서 유배를 떠났던가. 1495년(연산군1)에 과거 합격하여 관로에 들어선 후, 1504년에는 사간원 헌납을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된다. 이 해 논란이 된 사건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자는 논의이다. (중략) 당시 이행은 왕에게 간언하는 홍문관 관원으로서 윤씨의 추숭에 반대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에 오르게 된다.

그 유배길은 어떠했던가. 갑자년(1504년) 4월 장형(杖刑)을 맞고 충주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벗인 박은(朴誾)이 참수를 당하자 박은과 친하다는 이유로 또 장형을 받고 노역에 충원되었다. 9월에는 거의 죽을 때까지 모진 고문을 받았고, 12월에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였지만, 또 장형을 맞고 함안군의 관노로 배속되었다. (중략)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엘리트가 거친다는 홍문관 관원에서 한순간 죄인으로 전락하여 남쪽 끝으로 쫓겨난 처지, 장형과 고문을 또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기약 없는 유배지에서의 막연함. 이 모든 것이 그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비바람과 함께 절망과 좌절이 엄습하자 그는 한 잔 술로 이를 이겨내려 하였다. 그에게 음주란 곧 절망적 상황에서 삶을 부지하려는 생의 노력이었다. 그렇기에 이 시의 ‘何處難忘酒’를 “도저히 술이 없으면 안 되는 순간”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리라.(하략)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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