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전통色이야기 28] 백의(白衣)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평민을 가리켜
[한국의전통色이야기 28] 백의(白衣)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평민을 가리켜
  •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23.02.13 10:44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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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불유령(白衣不踰嶺)

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사진을 보면 조선 사람들의 옷은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1950년대까지도 흰옷 입는 사람이 많았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은 옷을 집에서 만들어 입었으며, 섬유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유색 옷을 거의 입지 못했다. 흰 옷감을 염색해서 입는 일이 어려우므로 명주나, 모시, 광목 등 흰 옷감을 곱게 누인 다음 옷을 지어 입었다. 

유채색 옷은 상류층의 전유물

역사적으로 유채색은 상류층과 왕부(王府)의 전유물이었으니 왕조시대의 백성은 더욱 흰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성이 유색 옷을 입으면 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색이 낡은 옷을 다시 염색하려면 옷 한 벌 값이 들 정도로 비쌌다고 한다.<고려도경> 

백성이 쉽게 물들인(염색) 옷을 입기 어려웠고 염료를 생산하거나(쪽), 수입하는 것은 왕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흰옷은 곧 백성의 옷이었다. 

백(白)은 흰색을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없는 것, 채색 않은 것, 깨끗함 등이다. 백의(白衣)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하인, 평민, 백성, 벼슬하지 못한 사람, 훈련받지 않은 군사 등의 의미로 기록되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 하인)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법사 진정(眞定)은 신라 사람인데 백의(白衣:평민)였을 때는 군대에 적을 두었다. 

◎혜통(釋惠通)의 씨족은 미상인데 백의(白衣)일 때 집이 남산서쪽 은천동 어귀에 있었다.<삼국유사> 

◎백의(白衣: 벼슬이 없는 선비)도 10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데 남(藍)색 관복의 참외관(參外官: 7품이하 하급관리)은 어찌하여 3번 밖에 응시할 수 없는 것인가?<고려사> 

“과거 급제 못하면 고향 안간다”

백의불유령(白衣不踰嶺)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평민(白衣)신분으로는 고개를 넘지 않는다’,  즉 문경새재를 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은 공맹(孔孟)의 고향(鄒魯之鄕‧추로지향)으로서 과거급제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는 자는 없다(白衣不踰嶺)고 한다. 신하가 아뢰기를 영남의 정승과 판서 등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名公巨卿)들이 예로부터 많이 나왔지만 서로 과거에 낙방하기를 기대하니 지금은 인심을 잃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백의불유령의 풍속은 아직 존재합니다.<영조 34년> 

◎영남사람이 ‘백의불유령’하는 것은 문과뿐만 아니고 무과 역시 그렇습니다. 

◎홍패(紅牌: 과거합격증)를 품고 들창 밑에서 늙는 자는 몇 사람인지 모른다. 그것을 어진정치라고 말하는데 영남사람은 백의불유령을 스스로 지키면서도 서울에서 일을 구하지 않는다. 이조와 병조 역시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정규 또는 임시 벼슬아치의 임면은(......), 국자감에 이르기까지 규례에 따라 벼슬을 높이는 외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 같다.<영조 37년> 옛날의 ‘백의불유령’은 공직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은 모든 분야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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