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9] 최부의 ‘표해록’, "동방견문록 능가하는 최고의 중국 기행문” (上)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9] 최부의 ‘표해록’, "동방견문록 능가하는 최고의 중국 기행문” (上)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2.27 14:02
  • 호수 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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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가 지은 ‘표해록’ 표지와 글씨체.
최부가 지은 ‘표해록’ 표지와 글씨체.

조선 최초로 양자강 이남지역 등 6개월 간 3500여km 기록한 표류기

일본·미국 등서 번역 출간…한·중·일 학자들 책 주제로 좌담회 개최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우리만의 앞선 기술과 발명품이 있다. 전기차 배터리(LG에너지솔루션), 반도체(삼성전자), 조선(거북선) 등이 그것이다. 여행서로는 ‘표해록’(漂海錄)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성종 때 문신 최부(崔溥·1454~1504년)가 배를 타고 제주에서 나주로 가던 중 표류해 중국 남쪽 지역에 표착했다가 북경으로 이송된 후 조선의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개월 간, 3500여km의 여정을 기록했다. 3권 2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최부는 사헌부 감찰·홍문관 부수찬 등 여러 관직을 지낸 학사로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 편찬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이 책은 일찍이 일본과 미국에서 소개됐다. 1769년 기요타 기미카네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출간했고, 존 메스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표해록 영역본(1958년)을 제출했고, 1965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중국 학계는 외국인이 기록한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표해록을 꼽았다. 북경대 거전자 교수는 표해록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능가하는 최고의 중국기행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이유로 표해록이 운명과 맞서 싸우는 분투정신, 국가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애국정신, 환관이 발호하는 명대의 정치를 질타하는 비판정신 등을 들었다. 1995년에는 중국에서 한·중·일 학자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부표해록연구출판좌담회’가 열리기도 했다. 

표해록은 우연히 쓰여 졌다. 최부는 1487년 9월, 도주 노비나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일을 하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돼 제주에 파견됐다. 이듬해 부친상을 접하고 제주 수정사 주지의 사선을 빌려 타고 일행 42명과 함께 제주 별도포(화북포)를 떠나 고향 나주를 향해 출범했다.  

최부 일행은 추자도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맞아 표류했다. 폭풍우와 기갈, 선원들과의 갈등, 해적의 위협 등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 끝에 표류 14일 만인 1월 16일 절강성 임해현에 표착했다.

처음에는 왜구로 오인 받아 붙잡혀 사형 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다행히 정직한 중국 관리의 도움으로 조선 관원 신분이 확인돼 송환 절차에 따라 북경으로 이송되게 됐다.  

최부 일행은 항주와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조선 사대부가 가보고 싶어 하는 중국 강남과 대운하를 처음 경험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양주-회안-서주를 지나 산동성과 하북성을 거쳐 북경에 도착해 명나라 황제 홍치제(1470~1505년)를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최부는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고, 부친상을 이유로 상복을 벗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에 감탄한 홍치제가 상을 하사하고, 한양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부에게 성종이 서책으로 기록해 보고하도록 지시해 표해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표해록 중 소주에서 최부가 중국인들과 나눈 다음의 대화가 흥미롭다. 

이 날은 맑았다. 소주는 옛날 오왕 합려가 오자서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해 도읍했던 곳이다. 정오에 성이 각각 왕(王)과 송(宋)이라는 안찰어사 두 대인이 역으로 와 예빈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몇 품이요?”

나는 대답했다.

“5품관이요”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시오?”

“우리 나라 선비들은 모두 경학을 궁리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소. 그러나 풍월을 읊조리는 것을 천시하기 때문에 나 역시 시사(詩詞)는 배우지 않았소.”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 그 후예는 있소? 또 사당이나 무덤이 있어 제사를 받들고 있소?”

“기자의 후손인 기준은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으로 도망하여 도읍했으나, 후에 백제에게 멸망당했으며, 지금은 후사가 없소. 기자묘는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짐승과 예물로써 제사를 지내고 있소.”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謀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

두 대인이 묻기를 마치고, 외랑(外廊)에게 명하여 쌀 한 쟁반, 두부 한 쟁반, 국수 한 쟁반을 보내주도록 했다. 나는 시를 지어 답례했다(표해록에서 발췌).

최부는 연도의 수운제도와 갑문의 설치, 경유지의 시정, 풍속을 꼼꼼히 기록했다. 명의 정치와 환관의 발호, 수차(水車) 제작법, 중국 강남과 강북의 성정, 산천, 도리 등의 기록도 남겼다.  

최부는 연산군 때 김종직 측에 섰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며 효수됐다. 광주 금남로가 그의 호 금남에서 따온 것이다(다음 주 최부의 ‘표해록’ 下편이 이어짐).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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