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2] ‘홍길동전’ 저자 허균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백성…왜 업신여기나”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2] ‘홍길동전’ 저자 허균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백성…왜 업신여기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4.24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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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치·사회적 모순 타개하려다 역모 죄로 능지처참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 윤리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

서얼 차별 철폐 주장, 민중 봉기 경고, 종도 대등하게 대우

조선 사회의 병폐를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저자 허 균. 조선 광해군 때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조선 사회의 병폐를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저자 허 균. 조선 광해군 때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죽이더라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걸작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許筠·1569~1618년)에 대해 신하들이 진정한 내용 중 일부이다. 허균이 얼마나 사악한 일을 저질렀으면 이런 저주의 말을 들었을까. 

허균은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다. 그가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라고 한 말에서 보듯이 그는 왕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라고 말했듯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있는 철학자이자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부안 명기 이매창과 친밀

실제로 허균은 기녀들을 가까이 두었다. 황해도 도사(都事·종5품)로 부임하던 중 한성부의 기녀와 동행해 탄핵을 받기도 했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轉運判官)을 하면서 부안의 명기 이매창과 친밀하게 지내기도 했다. 이매창이 죽기 1년 전 보낸 편지에 이매창을 그리워하는 허균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봉래산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네. 낭자는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 응당 비웃겠지. 그때 만약 한 생각이라도 어긋났다면 나와 낭자의 사귐이 어찌 10년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나?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지.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퍼지는구려.”

허균은 조선 중기, 강릉 사천진리의 애일당(愛日堂)에서 ‘금수저’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로 두 번 결혼해 3남3녀를 낳았다. 허난설헌(허초희)이 누나이다. 류성룡은 허씨 집안과 각별해 나중에 허균의 문집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허균은 사명당에게 불교와 문학을 배웠고, 류성룡의 문하에서 문장을 배우고, 손곡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를 배웠다. 문과 정시에 을과 급제했고,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했다. 이후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직인 접반사(接伴使)로 활동하면서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높은 학식을 인정받았다.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정2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허균은 아버지처럼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안동 김씨 김대섭의 차녀와, 두 번째는 동인의 초대 당수 선산 김씨 김효원의 딸과 재혼했다. 

▷백성을 세종류로 구분

허균은 시대를 거스른 진보주의자였다.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했으며, 종 등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여겼다. 그런 이유에서 지배층으로부터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고, 요사스럽다’는 등의 혹평을 받았다.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는 글로서 당시 사회제도 측면으로 볼 때 혁명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 글에서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 등 셋으로 나눴다.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이라고 했다. 원민은 정치가에게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의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으로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해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호민을 상징하고 있다.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딪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호민을 대변한다. 

허균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 지지했다가 주변 인물들로부터 원한을 샀다. 폐모에 반대하다 유배된 영의정 기자헌(1567~1624년)과도 마찰을 빚었다. 기자헌이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고자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었다. 

허균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 계기는 벽서였다. 1618년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이 벽서가 허균의 심복인 현응민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끝내 복권·신원 안돼

허균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심문 받는 줄로만 알았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해 광해군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 놈아!”라고 욕을 퍼부었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끌려 나가 한양 서쪽의 저자거리에서 사지가 찢겨져 죽었다. 

정적이었던 기자헌조차 “예로부터 심문도 하지 않고 결안(結案·형벌을 결정한 안문)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供招·죄인이 자백한 말)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점은 조선이 멸하기까지 유일하게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버림), 복권이 되지 못했던 사실이다. 광해군 시기 옥사와 역모 혐의의 피해자들 모두가 원상복귀 됐지만 허균만은 끝내 안됐다. 허균을 연구한 장정룡 강릉대 교수는 “병란과 정쟁이 격심했던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는 등 시대를 앞서 가는 탁월한 식견을 제시하며 정치·사회적 모순을 타개하려 했던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오늘날 허균과 같은 인물이 존재했다면 대통령이 되었거나 폐인이 됐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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