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⑬
박재간,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⑬
  • 관리자
  • 승인 2009.07.17 17:59
  • 호수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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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창립 40주년] 한국노년학회 창설 과정에 관여한 노인회
국제노년학회의 제11차 총회가 1978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열렸는데 필자는 그 대회에 초청 받아 참석했다. 영국 캠브리지대 노년학연구팀장인 ‘센더슨’(Sanderson) 교수의 추천으로 필자를 초청했다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었다. 필자가 센더슨 교수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전 영국에 방문했을 때 그의 연구실에 들러 노년학 관련 자료를 얻어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동경대회 참석은 우리나라로서는 노인문제와 관련해 국제학회와 연결을 맺게 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 대회에는 67개국에서 노인문제를 전공하는 학자 1400명 이상이 참가해서 5일간에 걸쳐 각자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필자는 당시 노인복지법안을 작성해서 국회에 제출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와 관련된 사항을 소속 분과위원회에서 약 7분간에 걸쳐 발표했다.

서구사회 여러 나라를 비롯해 선진 각국에는 이미 국가별로 노년학회가 결성돼 노인문제연구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도 이 대회에 참석, 비로소 알게 됐다. 필자는 귀국 후 우리나라에도 노년학회를 창설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발기인대표로 대한노인회 박관수 회장을 추대했다.

당시 필자는 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이기는 했지만 전국의 교수들을 결집시켜 노인문제와 관련된 학술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한노인회와 같은 큰 단체가 앞장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박관수 회장도 대한노인회가 한국노년학회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자는 필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노인복지가 잘 되기 위해서는 노인문제를 연구하는 학술단체에 의한 연구활동이 활성화돼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한노인회는 1978년 9월에 접어들면서부터 한국노년학회 발기인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창립취지문과 회칙을 작성하고, 9월 초순에는 전국 대학의 사회학과, 가족학과, 사회복지학과, 사회사업학과 교수들에게 학회가입을 권고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발기인총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참석한 주요 인사는 서울대학 서봉연·하상락·고영복 교수, 중앙대 김영모 교수, 숭실대 조상경 교수, 건국대 현두일 교수, 대구대 김상규 교수, 동덕여대 이윤숙 교수, 그리고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최천송·민재성 연구위원 등 50여명의 학계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날 총회에서 초대회장은 대한노인회 박관수 회장을 선출했고, 필자는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박관수 회장은 개회인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우리나라는 경로효친의 미풍양속이 아직까지는 존속되고 있지만 전망은 그리 밝은 편은 못된다. 이미 노인들 중에는 자녀가 있음에도 그 자녀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바, 앞으로는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된다. 오늘 우리가 노년학회를 창설하는 목적은 당면한 노인문제의 해결방안을 연구하여 그 대안을 제시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인은 전국 노인을 대표해서 이 학회활동에 동참해 주신 학계인사 여러분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관수 회장은 한국노년학회의 초대회장으로 조직기반 확대에 기여했으며, 그 후 제2대 회장은 서울대의 허 정 교수, 제3대 회장은 필자가 맡아 학회 운영을 주도하면서 세력은 점차 확장됐다. 1981년 7월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제11차 국제노년학총회에 필자가 한국대표로 참석해 한국노년학회를 국제노년학회의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절차를 밝기도 했다.

한국노년학회의 구성원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1000명을 초과하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에 이르면서부터는 3000명 이상의 교수 및 전문인력이 가담하는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국노년학회는 지난 30년간 대한노인회 회장을 계속 당연직 고문으로 추대해 학회 운영에 관한 제반사항에 대한 자문을 받고 있으며, 노인회 역시 노년학회의 중진학자 몇 분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노인복지정책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자문 받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대한노인회 회장이 한국노년학회의 회장을 겸임하던 체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양 단체는 노인복지정책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항상 밀접한 유대를 맺어가며 공동보조를 취해 나갔다. 1970년대 말 대한노인회와 한국노인문제연구소가 노인복지법 제정을 위한 대정부 교섭을 벌일 때도 한국노년학회는 법제정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법이 통과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1980년대에는 당시 대한노인회가 추진했던 경로당에 선풍기보내기운동, 노인급식프로그램의 양적·질적 개선운동, 생활보호대상 노인에 대한 처우개선을 목표로 대정부 교섭을 벌이던 노인회에 힘을 실어주었다.

1990년대 또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노령수당, 경로연금, 노인보건의료정책, 노인취업정책의 강화, 재가노인복지서비스의 질적·양적 확대를 요구하는 등 노인회의 요구사항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믿음식한 동조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95년 5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던 무갹출노령연금제도 조기실시의 필요성을 강조한 세미나의 개최, 그리고 1998년 가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국노년학회 회원들이 앞장섰던 노령수당지급제도의 조기실시를 요구하는 대중집회 등은 그간 우리 노인회가 끈질기게 요구하던 경로연금지급제도 조기도입을 가능케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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