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4]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直指’, “646년 전 발간한 이 책에 어떤 내용 담겼나”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4]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直指’, “646년 전 발간한 이 책에 어떤 내용 담겼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5.22 13:31
  • 호수 8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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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에 중국·인도 고승들의 법어·대화·편지 등 내용 기록

프랑스 외교관, 표지에 ‘한국서 발간한 최고의 금속활자본’ 적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지통 선사가 어느 날 밤 법당을 돌다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는 이미 크게 깨달았도다!”

다음날 귀종 선사가 법상에 올라가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어제 크게 깨달았다는 승려는 나와 보라”고 했다. 지통 선사가 나가서 “지통입니다”라고 밝혔다.

귀종 선사가 “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크게 깨달았다고 하였는가? 시험 삼아 설명하여 보아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통 선사가 대답하기를 “할머니는 원래 여자다”라고 했다.

이 대화는 직지(直指)에 수록된 선승들의 선문선답 중 하나이다. 불교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이란 말도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다. ‘할머니는 원래 여자다’라는 건 당연한 말이다. 마치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외친 것과 같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당연한 것을 말한다.

직지의 원래 이름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로, 직지의 의미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 꿰뚫어 깨달음에 이르라’(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이다. 고려시대인 1377년(우왕 3년) 청주 흥덕사에서 당시 백운 경한스님(1298~1374년)이 중국·인도 등 역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이다. 상·하권으로 간행됐으나 현재는 하권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 2001년 9월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세계최초 금속 활자본 ‘직지’의 표지.
세계최초 금속 활자본 ‘직지’의 표지.

◇스승보다 일찍 깨달은 제자

위에서 언급했듯 직지에는 역대 조사들의 “불현듯 크게 깨달았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깨달음이란 스스로 얻는 것이지 결코 남이 자신을 대신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체득(體得), 체감(體感), 체인(體認)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이유다. 자기 몸으로 느끼고, 자기 몸으로 인식해 득도한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스승을 만나면 쉽게 깨달음을 얻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직지 22장이 그것을 증명한다.

“신찬 선사는 어릴 적에 계현 법사에게 출가했다. 그의 은사 계현 법사는 고령사의 강사(講師)인데 제자인 신찬이 훌륭한 강사가 되어 자기의 뒤를 이어줄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경전을 가르쳤다. 

신찬은 타고난 현명함과 꾸준한 노력으로 오래지 않아 스승의 실력을 능가했다. 불교 경전을 어느 정도 섭렵한 신찬은 참선을 통해 생사해탈의 큰일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신찬이 자신의 간절한 뜻을 스승에게 말씀드렸으나 스승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더 이상 헛되이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신찬은 몰래 도망하여 백장 선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불철주야하며 피눈물 나는 정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견성오도(見性悟道)했다. 그는 처음 자신을 입문시켜 불경을 가르쳐 주고 지극히 아껴준 계현 법사의 은혜를 생각하고는 고령사로 돌아왔다.

계현 법사는 “너는 나를 떠나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래, 그동안 무슨 소득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찬은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계현 법사가 신찬에게 목욕물을 준비시키고 등을 닦아달라고 부탁했다. 신찬은 스승의 등을 깨끗이 닦고 나서 스승의 등을 가볍게 치면서 중얼거렸다. 

“법당은 참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흘끗 돌아보았다. 그러자 신찬은 다시 “부처가 영험은 없어도 방광(放光·부처가 광명을 냄)은 할 줄 아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스승은 신찬이 심상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했다. 

◇마음에 두지 않아야 행복해져 

직지는 고승들의 선문 선답을 통해 행복의 참된 의미를 풀어놓기도 했다.

“암두 선사가 말하기를, ‘이번 생에서 쉬지 못하면 어느 때에 쉬리오. 쉬는 것은 금생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쉰다는 것은 망상이 없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쉬는 것이다’.”

암두 선사는 마음이 쉬는 것이 바로 망상이 없어지는 때라고 했는데 이 한 줄이 법어의 핵심이다. 흔히 선사들은 ‘깨어 있는 휴식’을 요구한다. 몸을 한가롭게 두는 것은 일종의 게으름이지만 정신을 맑게 하는 여유가 진짜 휴식이다. 즉, 스트레스와 긴장을 해소하는 삶의 여백을 일러서 깨어 있는 휴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쉰다는 것은 아집과 분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경지인지도 모른다.

청주의 마야사에서 반농반선의 삶을 살고 있는 현진스님에 따르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방법이란 바로 ‘쉬고, 또 쉬라’다. 달리 말해 현재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석공이 조각할 때 필요 없는 부분을 떼어내고 나면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듯 행복을 방해하는 열등감과 불만족을 극복해야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선사들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주인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선사의 어록에 등장하는 불성, 청정, 진여, 무심이라는 단어들이 모두 참다운 주인공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무엇이든 노예가 되면 행복을 방해받는다. 돈이든, 명예든 그 순간 노예가 되면 나의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 거둔 선사가 말하는 행복의 비법은 ‘무심’이다. 무심은 마음이 쉬는 것이고, 열등감이 차분히 소멸된 상태다. 

한편 직지는 1886년 한국·프랑스의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초대 주한공사대리로 부임한 콜랭 드 플랑시가 국내 지방에서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책이다. 

플랑시 공사대리는 직지 표지에 ‘1377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고 검은색 잉크로 기록해놓기도 했다. 

직지 하권의 본문 첫 장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책 표지 제목은 ‘직지’인 반면, 마지막 장에는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권하’란 제목이 쓰여 있다. 그뜻은 ‘백운 경한스님이 불교의 선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역대 부처, 승려들의 말씀을 편찬한 글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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