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8] ‘고운담골’ 표지석 감동 스토리 “역관이 어찌 중국의 지체 높은 가문을 더럽히겠느냐”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8] ‘고운담골’ 표지석 감동 스토리 “역관이 어찌 중국의 지체 높은 가문을 더럽히겠느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6.26 14:40
  • 호수 8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을지로입구역 부근에 있는 ‘고운담골’ 표지석. 고운담골에는 조선의 역관과 명나라 고위층 부인 사이에 있었던 드라마틱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을지로입구역 부근에 있는 ‘고운담골’ 표지석. 고운담골에는 조선의 역관과 명나라 고위층 부인 사이에 있었던 드라마틱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부친 장례 비용 마련하려 기녀 노릇한 딱한 사정 듣고 도와줘 

후에 고위직 아내가 돼 조·명 간 외교 현안 타결에 중요 역할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서울 을지로입구역 8번 출구 쪽에 ‘고운담골’이란 표지석이 서 있다. 원래 한자로 보은단동(報恩緞洞)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은단골→보운단골→고운담골로 변했다. 이 표지석에 훈훈한 감동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명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郞·차관급) 석성(石星)의 부인이 손수 수놓은 ‘보은단(報恩緞)’이란 비단 100필을 조선의 역관 홍순언(1530-1598년)이 사는 집으로 보낸 일이 있다. 보은단동은 그런 연유에서 생겨난 말로, 당시 홍순언이 살던 을지로1가 180번지 일대를 일컫는다. 

홍순언이 한 번은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다가 통주에 있는 기관(妓館)에서 잤다. 기관 사람이 “이 방 기녀는 많은 돈의 가치가 있다”면서 방 하나를 가리켰다. 홍순언이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예쁜 여인이 상복을 입고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홍순언이 사연을 물은 즉 여인은 자기가 주사(主事)의 딸로 부친의 관을 운반해 고향으로 돌아갈 비용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 수 밖에 없게 됐다는 기막힌 사정을 털어놓았다. 홍순언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홍순언은 “외국의 천한 역관이 어찌 중국의 지체 높은 가문을 더럽히겠느냐”면서 가지고 있는 나랏돈을 다 주고 그대로 혼자 밤을 보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동료 역관들은 모두 홍순언을 “바보”라고 비웃고 조롱했으나 홍순언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년 끌어온 ‘종계변무’ 타결 

조선에 돌아온 홍순언은 나랏돈을 허투루 쓴 죄목으로 옥에 갇혔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해결해야 할 외교적 현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이다. 종계변무란 ‘종가의 혈통’(종계)에 대해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히는 것’(변무)을 말한다. 

중국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이 아니라 이성계의 정적인 고려 권신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돼 있었다. 이는 명나라로 도주한 이성계의 정적들이 지어낸 이야기였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이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줄기차게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중국 황실은 이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종계변무이다. 

중국 사행단은 이 문제로 한양을 출발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심지어 역관들도 사행단에 따라가는 걸 주저했다. 그 무렵 중국을 다녀온 역관들로부터 “중국 예부로부터 ‘홍순언이 함께 오느냐’고 묻더라”는 말이 나오곤 했다. 마침 명에 사행단을 보낼 일이 생겼다. 그러나 역관들이 순순히 나서지 않았다. 고민하던 신하들은 옥중의 홍순언을 떠올리고 왕에게 홍순언을 추천했고 왕도 이를 허락했다. 

홍순언은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종계변무사를 따라 명에 갔다. 이들 일행이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자 화려한 장막(帳幕)들이 구름에 닿을 듯했다. 이때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 홍판사(洪判事)를 찾으며 말하기를 “예부시랑 석성공(公)이 홍판사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영접하러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홍순언은 계집종 10여 명이 떼를 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 피하려 했다. 그러자 석성이 말하기를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아내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부인도 홍순언을 보고 곧 꿇어앉아 절을 했다. 당황한 홍순언이 무릎을 꿇고  절 받는 걸 사양했다. 석성이 이를 보고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군에게 절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부인이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의 장례를 잘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느 날엔들 잊었겠습니까?”라고 말하곤 잔치를 베풀고 직접 잔을 잡고 올렸다. 

기관에서 만난 소복의 여인이 후에 예부시랑의 아내가 돼 지금 기적처럼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예부시랑은 제향, 교육, 과거를 담당했다. 종계변무도 예부시랑의 관할이었다. 석성은 보은의 차원에서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석성의 도움으로 200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있었던 고질적인 외교 현안이 선조 17년(1584년)에 극적으로 타결됐다. 선조는 홍순언 덕분에 종계변무가 해결되자 홍순언이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했다.  

◇후손들, 성주로 이주해 가문 이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다시 한 번 홍순언의 신세를 지게 됐다. 왜의 침략에 당황한 조선은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기로 했다. 홍순언이 이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파병 요청을 받은 명은 군대를 보낼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석성은 이때 군대를 관할하던 병부상서가 돼 있었다. 석성이 “조선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황실을 설득해 명군의 조선 파병이 이루어졌다. 

뒷이야기도 있다. 명나라 황제 신종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물어 석성을 투옥시켰다. 감옥에서 석성은 두 아들을 불러 “명나라에서는 죄인이 돼 더는 살 수가 없으니 조선으로 가서 살라”는 유언을 남기고 1599년 옥사했다. 아들 석천이 1597년 경상도 가야산 자락의 성주로 와서 성주 석씨의 시조가 됐다. 오현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