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동녘에서 거닐다’ 전, 김기창·이상범·정종여가 함께 그린 ‘송하인물’ 눈길
국립현대미술관 ‘동녘에서 거닐다’ 전, 김기창·이상범·정종여가 함께 그린 ‘송하인물’ 눈길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3.06.26 15:03
  • 호수 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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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표구 기술자로 이름을 알리다 동산방화랑을 설립해 동양화가 발굴에 큰 역할을 한 동산 박주환 대표의 기증작을 통해 근대 한국화 변천사를 살펴본다. 사진은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청계 정종여가 합작해 그린 1949년 작 ‘송하인물’.
이번 전시는 표구 기술자로 이름을 알리다 동산방화랑을 설립해 동양화가 발굴에 큰 역할을 한 동산 박주환 대표의 기증작을 통해 근대 한국화 변천사를 살펴본다. 사진은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청계 정종여가 합작해 그린 1949년 작 ‘송하인물’.

‘동산방화랑’ 박주환 대표가 60년에 걸쳐 모은 작품 200여점 기증

90여점 엄선해 전시… 1920년대부터 근대 한국화의 흐름 한눈에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1961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에 ‘동산방 표구사’를 설립하고 표구(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 기술자로 이름을 알린 동산 박주환(1929∼2020) 대표. 특히 그는 표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동양화 분야에서 한국 전통 표구기술의 대가로 꼽혔다. 그러다 1974년 ‘표구사’는 ‘화랑’으로 변신했고, 현재까지 고서화와 한국화 기획 전시를 통해 역량 있는 동양화가를 발굴하고 있다. 또 동산방화랑은 1976년 ‘동양화 중견작가 21인전’을 시작으로 신진 작가 발굴과 실험적인 전시 기획을 열며 한국화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산방화랑이 60년 넘게 모은 한국화의 걸작을 소개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12일까지 진행되는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전에서는 박 대표가 모은 한국화의 정수를 선보인다.

대를 이어 동산방화랑을 운영하는 박우홍 대표는 2021년과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한국화 154점 등 회화 198점과 조각 6점, 판화 4점, 서예 1점 등 총 209점 등 동산 박주환 컬렉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기증작 중 90여점을 골라 192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화의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 

먼저 1부 ‘신구화도: 옛 그림을 연구하여 새 그림을 그리다’에서는 1920년대 한국화 작가들의 근대화를 위한 시도를 살펴본다. ‘서화협회전’(1921-1936)과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 등 ‘전시’ 형식의 등장 및 서구 회화의 조형 원리에 대한 영향 속에서 화가들이 자신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이상범(1897~1972)의 ‘초동’과 허백련(1891~1977)의 ‘월매’이다. ‘초동’은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수묵산수화로 수확이 끝난 초겨울의 메마른 전답(田畓)과 소박한 농가, 푸른 잎을 떨어낸 둔덕 나무들의 황량함을 표현하고 있다. ‘월매’는 10폭 연폭 병풍으로 왼쪽에는 절개의 상징 대나무가 무리 지어 있고 오랜 세월을 견딘 거대한 매화나무가 강건한 가지를 오른쪽 여백을 향해 힘차게 뻗고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이상범의 ‘초동’(1926).
이상범의 ‘초동’(1926).

2부 ‘한국 그림의 실경’에서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시대 속 전통 화단의 계보를 잇고자 했던 작가들을 조명한다.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손재형의 ‘석죽’을 비롯해 이응노, 정종여, 장우성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눈여겨볼 작품은 ‘송하인물’(松下人物)이다. 송하인물은 소나무 아래에서 바위에 기대어 달을 감상하는 인물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청계 정종여(1914~1984)가 월북하기 1년 전인 1949년, 운보 김기창(1913~2001), 청전 이상범과 합작한 것이다. 정종여는 소나무, 김기창은 인물, 이상범은 마지막에 그림과 부합하는 화제를 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후 합작은 창작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3부 ‘전통적 소재와 새로운 표현’에서는 1960년대 이후 현대 한국화의 방향성을 모색했던 작가들을 소개한다. 이 시기 문을 열었던 동산방화랑은 원로작가 중심이던 화단계에서 청년·신진작가 발굴에 주목한다. 대표적 작가가 남천 송수남(1938~2013)이다. 그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지속적으로 ‘자연과 도시’ 연작에 몰두했고, 동산방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1988)에서는 해당 연작 100여 점을 출품하기도 했다. 연작에서는 가로수가 수묵으로 대담하게 표현돼 있고 그 사이로 현대 도시 속 건물을 다채롭게 묘사해 한국화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했다.

이어지는 4부 ‘중도의 세계: 오늘의 표정’에서는 전통 수묵화인 지·필·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업 세계를 펼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혼합된 장르와 매체들이 등장하며, 한국화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해석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중 이왈종(78)의 ‘생활 속에서-중도의 세계’는 해학적이고 자유로운 수묵과 채색으로 별자리, 자동차, 배, 사슴, 꽃, 물고기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을 그려냈다. 민화의 소재와 현대의 자동차나 뾰족지붕의 가옥 등이 한 공간 안에서 어지러이 공존하고 있다.

유근택의 ‘산책’은 어른과 아이가 함께 숲속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작가 개인의 일상을 주제로 표현한 작품으로, 현대로 올수록 작가의 내면적 세계를 끌어내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전시 말미 회랑 공간에서는 동산방 표구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진 동산방화랑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아카이브와 인터뷰 영상 등 총 120여 점을 전시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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