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9] 고급 요리집 조선 요리옥 “기생 불러 질탕하게 놀고, 상류층은 ‘사랑 놀음’도 하고”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9] 고급 요리집 조선 요리옥 “기생 불러 질탕하게 놀고, 상류층은 ‘사랑 놀음’도 하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7.03 13:54
  • 호수 8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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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역사적인 조선 요리옥 ‘태화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역사적인 조선 요리옥 ‘태화관’.

인천 개항과 함께 일본 요리옥 본 따 생겨나… 궁중 기녀들이 기생으로

1891년 혜천관이 최초… 태화관에서 33인이 3·1운동 독립선언문 낭독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매일 밤 명월관에 가보면 현관에 기생들의 신발이 그득히 있었다. 기생들은 가죽 위에 비단을 입힌 비단신을 신었다. 명월관 ‘보이’들은 기생들이 신고 온 신발을 서방님이 있는 ‘유부기’와 서방이 없는 ‘무부기’로 구별해 놓았다.”

1910년대 활동했던 이난향이란 기생이 적은 명월관 모습이다. 명월관은 1909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개점한 대표적인 조선 요리옥이다.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면서 당시 어전(御前)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 기녀들이 이곳에 모여 영업이 번창했다. 명월관은 기생을 두고 음식과 술을 판 형태의 음식점이다.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했다.

조선 요리옥의 모태는 어디일까. 역시 일본이다. 일본의 에도(도쿄)시대(1603~1867년)는 상업의 전성기였다. 대도시였던 에도에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술을 따르고 춤이나 노래로 흥을 돋우는 게이샤가 출현하면서 요리옥, 요리점, 요정, 일반식당 등이 생겼다. 요리옥과 요리점은 비슷했고, 요정은 그보다는 고급이다. 게이샤가 차지하는 비중이 좀 더 컸고 중요했다.

처음 조선에 들어온 일본 요리옥은 요정 수준이 아니었다. 술과 음식을 먹는 장소였다. 서울에 일본 요리옥이 처음 선보인 건 1880년대 제물포 개항 이후 일본인의 거주지가 생기면서다.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 일본 요리옥이 성업했다. 1906년 서울에 있었던 대표적인 일본 요리옥 화월루에는 게이샤가 30여명이 있었다.

조선 요리옥은 일본 요리옥을 본 땄다. 처음에는 조선식으로 모든 음식을 차리다가 점차 일본 요리옥을 닮아갔다. 술과 안주가 먼저 나오고 난 뒤 나중에 간단한 식사가 나왔다. 여기에 게이샤처럼 조선의 기생도 등장해 손님을 접대했다.

1936년 1월 16일자 매일신보에 ‘현재 조선 원조 이야기-그것은 누가 시작하였던가?’라는 칼럼이 실렸다. 이날 주제는 ‘요리’였다. 수월루가 선구자이고, 혜천관, 명월관이 나중에 생겼다고 썼다.

◇명월관 3층엔 방이 20개

수월루는 음식을 먹으면서 차도 마시고 목욕도 할 수 있는 다목적공간으로 대중이 이용했다. 상류층이 출입하는 요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를 차별화한 이가 윤병규이다 그는 1891년, 현재 서린동 조선관 자리에 혜천관이라는 조선 요리점을 열었다. 혜천관은 기생을 불러 질탕한 유흥도 하고, 공공한 연회라든가 교자(상)로 요리를 배달해 상류계급에서는 ‘사랑 놀음’을 차리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문을 연 명월관이 혜천관과 손님 유치 경쟁을 벌였다. 혜천관 주인이 광산 사업 파산으로 가게 문을 닫자 명월관 주인은 이를 계기로 인사동에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을 두는 등 가게를 확장했다. 관수동에 국일관이 생긴 건 이후의 일이다. 조선 요리옥의 원조는 혜천관이고, 조선 요리옥의 전성시대를 연 곳은 명월관이었다.

태화관은 원래 이완용의 사저인 순화궁이었는데 안순환이 1917년에 사들여 이를 조선 요리옥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오후 연회를 마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명월관 내부는 어떠했을까. 1917년 2월에 일본인이 발간한 계몽잡지 ‘신문계’ 47호에 실린 ‘경성유람기’라는 글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때는 열한시 반이라 이때 인력거 두 차가 명월관을 향해 몰아가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연회 대접하려고 명월관 요리점으로 가는 것이라. 조란화동(난간에는 조각 대들보에는 그림)과 분벽사창(하얗게 꾸민 벽과 비단으로 바른 창)이 황황한 전기 광선에 비치여 영롱찬란한 광경이 그릇 수정궁궐에 들어감을 깨닫지 못할 지라. 두 사람은 보이의 안내에 따라 3층루 한편 처소에 좌정했는데 술을 몇 잔씩 마시다 보니 문이 열리면서 종용히 들어와 날아가는 듯이 앉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두 사람을 향하여 인사하는 여자는 곧 광교 조합에 유명한 기생 춘외춘과 매홍이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접대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었다. 손님과 기생이 서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매홍은 거문고를, 춘회춘은 양금을 연주했다. 당시 명월관은 3층 규모에 방이 20호가 넘게 있었다. 기생들이 조합을 만들어 요리옥과 유곽 등을 전전할 때이다.”

◇기생도 세금 떼어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명월관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안순환은 출옥 후 서울 명동에 식도원을 차렸다. 그 무렵 서울 강북에 장춘원, 고려관, 태서관, 조선관 등 조선 요리옥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조선 요리옥이 성황을 이룰 때 기생들도 덩달아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요리점에 불려온 기생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돈을 받았다. 

기생 이난향은 “요릿집이나 개인집에서 연석이 벌어지는 사랑 놀음에 갔다 올 때는 시간에 따라 돈을 받았다. 어떤 요릿집은 2시간 반이면 3시간으로 넉넉히 시간을 잡아주기도 했다. 기생이 직접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적은 전표를 권번(券番·기생 조합)에 맡기면 권번에서 돈을 찾아오는 번거로운 방식이었지만 이것이 기생의 체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됐다”고 적었다. 

기생 춘외춘은 “기생이 받는 돈에도 세금을 뗐다”고 술회했다. 춘외춘은 “처음에는 첫 시간 1원 50전 그다음 시간부터는 50전씩 하고, 요리점과 조합에서 1할씩의 할금을 떼더니 사오년 전부터 첫 시간 1원 95전, 둘째 시간부터 1원 30전씩이 되고 할이도 늘어 2할 5부가 된 것이다”라고 기억했다.

조선 요리옥은 술이나 마시고 기생들과 사랑 놀음이나 하는 향락의 공간으로만 치부할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뜻 깊은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봐야할 것이다.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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