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1] ‘시쳇말’은 어디서 나왔나… 영조 “한 사람이 하면 백 사람 따라하며 ‘시체’라고 말해”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1] ‘시쳇말’은 어디서 나왔나… 영조 “한 사람이 하면 백 사람 따라하며 ‘시체’라고 말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7.31 13:46
  • 호수 88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윤복의 ‘춘화 보는 여인’. 조선 후기 일부 여성들이 패설에 빠져 비녀, 팔찌 등을 팔아 책을 구해 읽었다고 한다.
신윤복의 ‘춘화 보는 여인’. 조선 후기 일부 여성들이 패설에 빠져 비녀, 팔찌 등을 팔아 책을 구해 읽었다고 한다.

시체(時體)는 ‘그 시대의 풍습이나 유행’이란 뜻…‘말’이 붙어 ‘유행어’

조선 후기 한양에 30만 명 거주… 상인·중인·양반들 이익 취하려 몰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예전에 자주 쓰였던 ‘시쳇말’을 요즘은 좀처럼 듣기가 힘들다. 이 말은 예를 들면 “널 만난 순간, 시쳇말로 뿅 갔다”거나 “이곳이 바로 시쳇말로 요즘 가장 핫한 곳이다”라는 식으로 쓰이곤 했다. 

시쳇말은 무슨 뜻일까. 대부분 ‘시쳇말’하면 ‘죽은 사람의 몸’인 ‘시체(屍體)’를 떠올린다. 그러나 시쳇말은 ‘때 시(時)’ 자와 ‘몸 체(體)’ 자를 쓰는 한자어 ‘시체(時體)’에서 온 말이다. ‘그 시대의 풍습이나 유행을 따르거나 지식 따위를 받음’이란 뜻이다. 즉 시체는 유행이고, 시쳇말은 유행어라는 의미다. 따라서  앞에 예를 든 “널 만난 순간, 시쳇말로 뿅 갔다”는 “널 만난 순간, 유행어로 말하자면 뿅 갔다”란 의미가 된다.

시쳇말은 언제, 어떻게 나온 말일까. 이 말의 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세종, 성종, 숙종 등을 거치며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경제가 안정됐다. 외침도 거의 없어 백성이 마음 편하게 생업에 종사해 세금도 잘 냈다. 17세기 후반에 한양의 인구가 30만에 육박했을 정도다. 용산, 신촌, 왕십리 등 사대문 밖 지역이 한양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한양의 각처에 형성된 시장에서는 교역이 늘어났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이윤이 창출됐다.

상인들과 세력 있는 기관과 가문, 중인 집단, 개개인 모두가 이윤을 취하기 위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조선 후기 문필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옥(1760~1815년)은 달라진 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하가 버글거리며 온통 이익을 위하여 오고, 이익을 위하여 간다. 서울은 장인바치(장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와 장사치들이 모이는 곳이다. 거래하는 물품과 가게들이 별처럼 벌여있고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다. 남에게 자기 기술을 파는 사람이 있고, 자기 힘을 파는 사람이 있으며, 뒷간 치는 사람도 있고, 칼 갈아서 소 잡는 사람도 있고, 얼굴을 꾸며 몸 파는 사람도 있으니 세상에서 사고파는 일이 극도에 달하였다.”

◇영조의 윤음에 ‘시체’라는 말 나와

시장이 번창함에 따라 백성의 삶도 풍족해졌고 시대 변화에도 속도가 붙었다. 사람들은 변화를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1757년 영조(1694~1776년)가 내린 윤음(綸音·국왕이 관인과 인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에 바로 ‘시쳇말’이 나온다. 

“지금의 사치는 옛날의 사치와 다르다. 의복과 음식은 빈부에 따라 각자 다른 것인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 한 사람이 하면 백 사람이 따라하며 ‘시체’(時體)라고 말한다.”

자기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시체를 따라가는 풍조,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바로 유행이다. 19세기가 되자 유행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유행은 한양의 공경(삼정승과 아홉 고관직)과 부귀한 집안, 그 아래 사대부, 가난한 선비, 궁벽한 곳의 사람들로 시간차를 두고 퍼져나갔다. 한양에 새로운 의관이나 기물이 나오면 사대부들이 바로 구입했다. 몇 해도 되지 않아 그것들을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몇 해가 되면 궁벽한 고을, 먼 시골에서도 발견됐다. 먼 시골에서 겨우 이것을 구했을 때는 이미 한양에선 자취를 감추고 만다. 벌써 다른 물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조정에선 이런 유행에 보수적으로 대처했다. 현종(1641~1674년) 때부터 사치에 대한 규제가 10년 단위로 내려졌다. 그러나 유행이 풍속이 돼버려 한 가지도 실효가 없었고, 법령만 부질없이 수정됐다. 

새로운 풍조 중 하나가 서학(西學)이다. 서학은 17세기 경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서양학문을 말하며, 천주교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1788년 조선 후기 학자이자 서예가인 이경명(1708~1782년)은 서학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오늘날 세속에는 이른바 서학이란 것이 진실로 하나의 큰 변괴입니다. 한양에서부터 먼 시골에 이르기까지 돌려가며 서로 속이고 유혹하여 어리석은 농부와 무지한 촌부까지도 그 책을 언문으로 베껴 신명처럼 받들면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렇게 계속된다면 요망한 학설로 인한 화가 끝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규방의 부인들이 ‘패설’에 몰두

조선을 지탱하던 ‘사대부, 한문, 유학’에 대항해 ‘백성, 언문(한글), 서학’이 대두됐다. 변화는 문화와 일상을 바꿨고, 여러 구성원들의 정신세계를 흔들어놓았다. 조선의 사대부에 가장 큰 위협이 된 계층은 중인그룹이다. 이들은 ‘시사’(詩社)라는 문학그룹을 조직해 서로 글 솜씨를 선보이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역대 시인들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는 사대부와 중인 외에 농사꾼, 나무꾼, 노비, 말단관리, 기생, 방외인과 같은 제반 계층이 문학 활동에 참여했다.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1720~1799년)은 당시 여성들이 바깥으로 관심을 두는 세태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보건대 근세 규방의 부인들이 다투어 하는 일은 오직 패설(稗說)을 숭상하는 것이어서 패설이 날로 증가하여 그 수가 천백 종이 넘는다. 서적 중개상들은 깨끗이 필사하여 빌려 보게 하고 번번이 그 값을 쳐서 이익을 삼았다. 부녀들 가운데 식견 없는 이들은 혹 비녀와 팔찌를 팔기도 하고 혹 빚을 내서라도 다투어 빌려 보며 소일하니 음식하고 옷 만드는 여자의 본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패설은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소설화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시체(유행)에 여성은 앞서갔지만 그에 반해 고관대작들은 그 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뒤처져 있었던 것 같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