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나는 세상의 파괴자다”… 원폭 제조자의 영광과 몰락
영화 ‘오펜하이머’, “나는 세상의 파괴자다”… 원폭 제조자의 영광과 몰락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3.08.21 15:01
  • 호수 8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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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이번 작품에서는 영웅에서 배신자로 몰락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는다. 사진은 극 중 한 장면.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이번 작품에서는 영웅에서 배신자로 몰락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는다. 사진은 극 중 한 장면.

‘맨해튼 계획’ 이끌어 영웅됐다 매카시 광풍에 몰락하는 과정 담아    

‘인터스텔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핵폭발 실험 장면 등 압권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사막에서는 그 유명한 ‘트리니티 실험’이 진행된다. 당시 12km 상공까지 버섯기둥이 만들어졌으며, 세계 최초의 핵실험으로 기록됐다. 실험 직후 일명 ‘맨해튼 계획’을 지휘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고 읊조린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 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잇달아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6년여간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막을 내린다. 덕분에 한반도 역시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는다. 

광복 78주년을 맞은 8월 15일,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을 이끌었던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했다. 책으로 발간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기반으로 한 이 작품은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로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을 맞아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삶을 학창 시절과 맨해튼 계획, 청문회 등으로 나눠 접근한다. 오펜하이머의 학창 시절, ‘맨해튼 프로젝트’는 풀컬러로 연출한데 비해, 1954년 오펜하이머의 밀실 청문회는 빛바랜 색감으로,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는 흑백으로 그렸다.

오펜하이머는 학창시절 학우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데다,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게다가 교수의 책상 위 풋사과에 독을 주사할 정도로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겉돌던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물리학도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다 맨해튼 계획을 이끌면서 오펜하이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뛰어난 과학자인 동시에 행정가의 면모를 보인 것. 충돌하는 과학자들 간 갈등을 조율하고, 프로젝트의 두 축인 과학자와 군이라는 이질적 집단 사이에서 긴장감을 조율한다. 뉴멕시코주의 허허벌판에서 3년 동안 진행된 극비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며 영웅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라는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1950년대 미국 전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이 오펜하이머를 청문회로까지 내몬다. 종전 이후 수소폭탄 개발을 비롯한 전후 군비 경쟁에 반대해 온 그는 좋은 타깃이 됐다. 

수십 년 전 기혼의 연인과 나눈 밀회, 가족의 공산당 가입 이력,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 등 모든 것이 폭로되며 사회·정치적으로 ‘난도질’당한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죄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고통을 받았고, 생전에 명예 회복도 하지 못했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그의 생애를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교차하며 보여준다. 이를 통해 모순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선택을 조명한다. 나치가 자행하는 폭력을 막고자 핵무기 개발이라는 차악을 택했지만, 히틀러 사망 뒤에도 폭탄의 폭파력을 극대화하는 투하 방식을 공군에 조언한다. 또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히틀러에게 원폭을 날리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외치다가도 군비 확장을 촉구하는 대통령에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호소한다. 

특히 이번 작품은 핵무기 개발을 다루고 있으면서 컴퓨터 그래픽(CG)을 사용하지 않아 놀라움을 주고 있다. 별의 수축과 팽창을 묘사한 장면부터 핵분열과 폭발, 무의식과 초자연의 세계, 우주와 양자물리학을 형상화 장면이 일품이다. 단연 최고의 장면은 핵폭탄 폭발 실험이다. 재래식 폭약을 폭발시켜 핵폭발 장면을 구현했는데 핵폭발과 후폭풍, 사운드를 나눠 그 섬뜩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폭발하는 불꽃, 버섯 모양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등장인물 눈에 초점을 맞추는 장면 전환 등이 압권이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핵물리학자의 복잡한 심리를 잘 보여줬다. 그를 프로젝트 총책임자로 임명한 그로브스 중장 역의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리기 위해 중상모략을 일삼은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무게감 있는 배우들의 호연도 작품을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놀란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국내 개봉 전 글로벌 흥행 수익 6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도 개봉 첫날 55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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