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4] 조선의 신참례(新參禮) “얼굴에 먹칠하고, 땅바닥에 구르게… 신참의 기 꺾으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4] 조선의 신참례(新參禮) “얼굴에 먹칠하고, 땅바닥에 구르게… 신참의 기 꺾으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8.28 15:09
  • 호수 8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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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의 ‘기산풍속도’. 과거 급제자의 얼굴에 먹물을 묻히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과거 급제자의 얼굴에 먹물을 묻히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새로 급제한 이에게 선배들이 가하는 체벌의 일종  

기생 끼고 밤늦도록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기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신고식이 있었다. 신참례(新參禮)가 그것이다. 신참례는 새로 벼슬길에 오른 신참들을 골탕 먹이는 관례를 말한다. 

15세기 성현(成俔·1439~1504)이 편찬한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신참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용재총화는 고려~조선시대 민간풍속, 문물제도 등에 대한 개인의 기록이다.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예문관·성균관·교서관)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는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도 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중에서도 예문관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을 허참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갖는 잔치를 면신이라 하며, 그 중간에 베푸는 잔치를 중일연이라 하였다. 매양 잔치 자리의 성찬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박수치며 하늘 보고 웃게 해 

급제한 사람을 한 번 크게 벗겨먹겠다는 심사가 엿보인다. 신참례에는 기생도 동원됐다. 용재총화에 그 부분에 관한 묘사가 있다.

“상관장을 중심으로 곡좌하고 봉교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라 한다. 아래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이 정도의 신참례는 그래도 양반이다. 일부에선 과거 중고등학교 졸업식, 대학가·군대의 신고식 등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조잡하고 추하기까지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심노숭(沈魯崇·1762~1837)이 지은 ‘자저실기’(自著實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자저실기는 조선 후기 학자 심노숭이 자신의 삶과 격동기의 정치, 사회‧문화적 실상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나라의 풍속에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대과(大科라 하고,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을 소과(小科)라고 한다. 사관의 선배들이 새로 급제한 신례들을 마전교(馬前橋·청계천)로 불러 오라 가라하며 장난거리로 삼는다. 이름을 거꾸로 부르게 하고, 더러운 도랑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 땅바닥에 누워 구르게 하고 ‘멍석말이’라 하고, 하늘로 펄쩍펄쩍 뛰게 하고 ‘별따리’라고 하였다. 박수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도 하고, 땅바닥에서 한 치 떨어지게 고개를 숙이게 하며, 얼굴에 먹물을 칠하기도 하고, 담을 타넘거나 춤을 추거나 한 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가기도 한다. 우스꽝스럽고 괴이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였다.”

◇선조 때 신참례 못하게 막아

사헌부에서 행해지던 신참례는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하 관원이 함께 내방에 들어가 정좌하며 새로 들어온 관원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신귀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한다. 이를 들지 못하면 신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신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신귀에게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신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명함)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 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신귀의 집에 몰려가면 신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 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노래한다.”

신참례의 폐단이 심해지자 조정에서 이를 금지하려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杖) 60에 처한다’는 규정을 넣기도 했다. 

과거에 9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던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문과에 급제한 후 외교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 소속되었는데 선배들에게 불공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이이와 쌍벽을 이루던 대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잘못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은 아니다”라고 신참례를 피할 도리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급기야 왕까지 나서서 신참례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폐지한다는 명을 내렸다. 선조 이후로 신참례 열기는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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