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5] 제주 기생 출신 최고 갑부 김만덕 “흉년 들자 굶주려 병든 이 1000명에 쌀 나눠줘”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5] 제주 기생 출신 최고 갑부 김만덕 “흉년 들자 굶주려 병든 이 1000명에 쌀 나눠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9.04 13:52
  • 호수 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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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 객주 차리고 쌀·소금을 미역·해삼으로 교환해 富 축적

제주시, ‘김만덕상’ 제정… 나눔 정신 기리며 ‘제2의 만덕’ 배출

조선 후기 제주 최고 갑부 김만덕의 초상화.
조선 후기 제주 최고 갑부 김만덕의 초상화.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왕조실록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여성이 있다. 김만덕(1739~1812년)이다. 실록뿐만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 우의정·영의정을 지낸 문신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도 이 제주 기생의 드라마틱한 삶을 책으로 남겼다. 그의 ‘번암집’(樊巖集)에 실린 ‘만덕전’(萬德傳)이다. 

만덕전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러 역경을 딛고 큰일을 해낸 것에 대한 찬탄과 임금의 배려로 제주 여자가 서울과 금강산 나들이를 하게 된 보기 드문 성사를 기록했다. 만덕전은 채제공의 ‘이충백전(李忠伯傳)’ 등과 같이 조선 후기 의협을 주제로 한 여타의 전(傳)들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그만큼 김만덕은 출중한 인물이었다.

경주에 최 부자가 있듯이 제주에는 김만덕이 있었다. 만덕은 제주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나갈 때 자기 재산으로 쌀을 구해 나눠주었다. 김만덕은 어떤 여자이고, 어떻게 여자 힘으로 그 많은 부를 일궈냈을까. 체제공은 그의 출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만덕은 성이 김씨이며 탐라의 양인 집안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귀의할 바가 없었다. 기녀에 의탁하여 살았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부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관아에서 기생의 이름을 기록해두던 책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순종적으로 기녀의 역을 행하였지만 스스로 기녀로 대접하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살에 그 사정을 관아에 읍소하니 관아에서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제외하고 양민으로 복귀시켰다. 만덕은 비록 집안에 고용된 남자 종과 거주했으나 탐라의 남자를 남편으로는 맞이하지 않았다.”

◇제주여성들 육지로 못나가던 시절

채제공은 김만덕이 재산을 늘리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했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십 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고 적었다. 김만덕이 살던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농업 이외에 상업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던 시대였다. 상업과 유통 경제의 발달로 가장 번창한 사업이 포구 무역과 객주업이었다. 

김만덕은 제주가 어업과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자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관기를 그만두고 건입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판매하는 일종의 중개상인이었다. 관기로 있으면서 관리들과 맺은 친분도 장사에 도움이 됐을 것이고, 여기에 더해 특유의 장사 수완도 큰 몫을 했다. 

제주는 쌀, 보리 등의 곡물이 부족했다. 김만덕은 외부에서 반입되는 쌀이나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의 독점권을 확보해 이를 미역, 전복 등 제주의 해산물과 교환했다. 쌀과 소금의 시세차익을 이용해 계속 부를 축적해나가 마침내 제주 최고의 여성갑부가 된 것이다.

김만덕은 부를 혼자만 향유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었다. 제주에 흉년이 들자 정조는 곡식을 배에 싣고 가서 구제하기를 명했다. 여러 군현의 사공들이 제주에 당도하자 김만덕은 쌀의 10분의 1을 취하여 친족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수송했다. 부황(浮黃) 난 자가 구름처럼 관가 뜰에 모여들었다. 관가에서는 수급을 조절해 차등 있게 나눠주었다. 남녀는 나와서 김만덕을 향해 “우리를 살려준 이는 만덕이로다”라고 칭송했다.

이런 내용을 제주목사로부터 접한 정조가 “만덕에게 소원이 있으면 쉽고 어려움을 묻지 말고 특별히 베풀라”고 명했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 임금의 분부대로 묻자 만덕은 “별다른 소원은 없고 원컨대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1만2000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국법은 제주의 여성들이 바다 건너 육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했다. 김만덕의 소원을 전해들은 정조는 한양 구경은 물론 금강산 유람을 허락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여행 기간 동안 편의를 제공케 했다. 김만덕이 들르는 지역의 관가에서 역마를 주고, 음식도 번갈아 대접하도록 한 것이다.

◇한양에서 스타가 돼 있었다

만덕전은 김만덕의 금강산 유람을 이렇게 기록했다.

“만덕은 배를 타고 만경창파를 건너서 병진년 가을 한양에 들어와 정승 채제공을 한두 번 만났다. 채제공은 그 사실을 왕께 아뢰었다. 왕은 선혜청에 명해 달마다 식량을 지급하게 했다. 며칠 후에 명하여 내의원 의녀로 삼아 모든 의녀의 반수(班首)로 두었다. 만덕은 전례에 의거하여 대궐로 들어가 여러 궁에 문안을 드리고 각기 의녀로서 시중을 들었다. 이에 왕이 전교하기를 “네가 일개 여자로서 의로운 기운을 발휘하여 주린 백성 천여 명을 구제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상으로 하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거한지 반년만인 정사년(1797년) 3월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동과 중향성의 기이한 경치를 두루 탐방하고, 금부처를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하고 공양을 드려 그 정성을 다하였다. 대개 불법이 탐라국에는 들어가지 않은 까닭에 만덕이 이때 나이가 쉰여덟이었으나 처음으로 절과 부처를 구경했다. 마침내 안문재를 넘어 유정사를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 총석정에 올라 천하의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였다.”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김만덕은 어느새 스타가 돼 있었다. 공경대부(삼정승과 아홉 고관직)와 선비 등이 만덕의 얼굴을 보려고 모였다. 

김만덕이 한양을 떠나기 전 채제공을 만난 자리에서 감사하며 목멘 소리로 “이승에서는 재상의 얼굴을 다시 뵙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채제공이 “천하의 수많은 사내 중에도 백록담 물을 먹고 금강산 유람을 한 이가 드물다. 지금 이별함에 임하여 도리어 아녀자의 가련한 태도를 짓는 것은 무슨까닭인가”라고 말했다.

김만덕은 제주에 돌아온 후 15년 만인 1812년에 세상을 떴다. 유언에 따라 묘지는 제주 성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이 마루’ 길가에 묻혔다. 제주는 해마다 ‘김만덕상’을 시상해 김만덕의 의로움을 기리는 한편 제2의 김만덕을 배출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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