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인 심노숭이 기록한 ‘자저실기’가 보여주는 선비의 생활상
아내의 내조·관직생활의 고달픔·임금 알현·노년의 樂 등 기록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살아갔을까. 그들은 조강지처를 어떻게 대했고, 관직생활은 어떠했으며, 임금에 대한 충정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에 대한 힌트가 심노숭의 일기장과 같은 ‘자저실기’(自著實記)에 있다.
심노숭(1762~1837년)은 조선 정조와 순조 연간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아버지 심난수는 노론 시파의 핵심적인 인물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희천군수와 제주목사,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외가는 한산 이씨로 외조부는 훈민정음 연구서인 ‘훈음종편’의 저자이자 인천부사를 지낸 이사질이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로 이의술의 딸이다. 경기도 포천에 집과 선산이 있고, 서울 집은 남산 아래 주자동에 있었다.
심노숭은 진사시에 급제한 뒤 과거공부에 열중했으나 문과에 오르지 못했다. 정조의 배려로 영희전 참봉에 임명됐다가 정조가 사망하자 반대편의 모략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 뒤 친구 김조순의 배려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된 뒤 차례로 태릉직장, 형조정랑, 논산현감, 천안군수, 광주판관, 임천군수 등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아내의 조언에 부끄러워한 남편
심노숭은 스스로를 글쓰기 병에 걸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신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몸은 깡마르고 허약하며, 키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작다. 등은 구부정하게 불쑥 솟았고, 배는 펑퍼짐하게 아래로 처졌다. 눈동자를 보면 속일 수 없다. 빈틈없이 보여도 엉성하고 방종한 구석이 있고, 거칠고 방탕한 속에도 칼 같은 강직함이 숨어 있다. 나를 아는 이는 몸과 마음이 딴판이라고 하고, 모르는 이는 생김새와 성품이 일치한다고 한다”라고 적었다.
그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아내의 내조와 관련해 “발끈하며 성질을 부려 절제하지 못하면 아내 이씨가 바로잡아주었다. 내가 성질을 부릴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지나고 나면 마지못해서 하듯 신신당부하며 타일러서 마음으로 느끼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심노숭은 아내의 조언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순간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귀양을 가셨다. 때마침 조운선(漕運船·국가에 바치는 쌀을 나르는 배)이 분창(分倉·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봄에는 나누어주는 일)을 시행하느라 정채(情債·시골 아전이 인정으로 바치는 금전)로 올라오는 쌀이 수십 포였다. 당시 서유린공이 호조판사를 맡고 있던 터라 말 한 마디 하면 그 쌀을 바로 얻을 수 있었다. 아내 이씨에게 상의했더니 아내가 ‘안됩니다. 쌀 수십 포대로는 몇 개월밖에 버티지 못합니다. 젊은 선비가 정승에게 청탁하는 짓과 몇 달치 쌀이 없는 것을 견줘보세요. 그 경중과 득실이 어떠한지요?’라고 했다. 내가 부끄러워 사과하고는 그만두고 말았다.”
그는 사는 집과 관련해 “옛사람들은 살아서는 좋은 집에 살고 죽어서는 명산에 묻힌다고 했다. 명산은 얻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얻는 것이 아니나 좋은 집은 그래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한양의 저택, 교외의 별장, 건물이 많은 가옥, 서늘한 집은 마음과 의지를 시원스럽고 여유롭게 하고 신체를 편하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보다 좋은 것이 없지만 누각에 거처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누각을 소유하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젊은 날에 일찍이 신루(神樓)라는 호를 지었는데 상상으로 누각을 지었다는 뜻이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생각할 때마다 유감이다.”
◇고달픈 당직생활
심노숭은 벼슬을 할 당시 당직의 고달픔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참봉 두 사람이 사흘씩 당직을 섰는데 출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단지 이틀이었다. 서로 교대할 때 조금 늦게 하면 그것도 어려워서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고달프다고 했다. 옥과 현감 이보원이 늙고 병든 것을 핑계로 몇 달 동안 번번이 저녁 전에 교대하니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당직 서는 날 이보원이 여태 자고 있어 창가에 걸터앉아 인사를 건넸다. 이보원이 ‘늙은이에게 왜 이렇게 조르시오’라고 해 서로 웃었다. 그 뒤로 이보원이 늦지를 못하고 ‘저 젊은 친구의 잔꾀에 넘어갔군’ 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임금을 알현한 당시 임금이 부친의 근황을 묻고 위로해준 일에 대해 감격하기도 했다.
“부친께서 제주어사로 계셨다. 내가 성균관 유생으로 전강(殿講) 때문에 입시했을 때 임금께서 부친 소식을 물으시고 ‘별이 나서 근래에는 동남풍이 분다. 배가 가는 데도 어려움이 없고 물도 좋아 병이 날 조짐이 없으며 장기(瘴氣·풍토병)도 적으리라. 잠시 지내다가 이듬해 3,4월이면 돌아올 수 있으리라’하셨다. 말씨가 부드럽고 온순해 어루만지고 도닥거려주심이 과히 융성하였다.”
전강은 성균관 유생 가운데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 임금이 친히 대궐에 모아 놓고 삼경이나 오경에서 제목을 뽑아 외게 하던 것을 말한다.
심노숭은 말년에 글짓기만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고백했다.
“평생 동안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소싯적에 글짓기를 좋아한 것, 벼슬하려는 계획, 정욕에 사로잡힌 것 세 가지 가운데 정욕이 가장 심했다. 늙고 난 뒤에는 모든 것에 담박해 욕망이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글짓기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못하였다.”

그는 집에 있으면 화가 나고 번민이 날마다 쌓여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고 문을 나서면 해마다 외톨이 신세가 더해 마음에 맞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고 투덜댔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조선 사대부의 부부관계, 관직생활, 노년의 삶 등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저실기가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휴머니스트가 발간한 ‘자저실기’(안대회·김보성 외 옮김)에서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