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허영과 기만의 산수연”
[백세시대 / 세상읽기] “허영과 기만의 산수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0.10 10:30
  • 호수 88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단법인 노인 단체 회장의 ‘산수연(傘壽宴) 가짜박사’ 소동으로 노인사회가 시끄럽다. 가짜박사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신정아씨이다. 한때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성곡미술관의 큐레이터와 동국대 조교수를 지냈고, 2007년 광주 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으로 내정된 바 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내연 관계로 입방아에 올랐던 바로 그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는 동국대와 광주 비엔날레에 지원할 때 캔자스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학사학위(BFA)를, 같은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예일대에서 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기재했다. 재판과정에서 학위 취득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실제로는 중경고를 졸업하고 캔자스대 서양화 학부과정을 중퇴했다. 졸업을 못했으니 최종학력은 고졸인 셈이다. 신씨는 비정상적인 방법(학습 튜터 고용, 대리출석)으로 이들 대학에서 학ㆍ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건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신씨의 말과 태도는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학위가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자신이 오히려 가짜 박사학위의 피해자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신씨는 수업료를 납부하고, 리포트를 제출하고, 논문을 쓰고, 디펜스의 과정을 다 마쳤지만 이 과정에서 자기를 도와준 린다 트레이시라는 미국 여성이 자기를 속인 것이라며 “논문 대필자에게 속았을 뿐 학위는 위조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검찰은 신정아의 변명 대부분이 거짓말이며, 린다 트레이시 또한 신정아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추정했다.

신정아 가짜학위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위 검증 바람이 불었고, 많은 유명인들이 가짜박사 또는 가짜학위 소유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만화가 이현세씨이다. 그는 만화 '버디'의 서문에서 최종학력이 대학 중퇴가 아니라 고졸이라고 학력 위조 사실을 고백했다. "학력은 25년 동안 벗어날 수 없는 핸디캡이 됐다"며 학력을 속이게 된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개중에는 정치인도 있었다. 염동연 열린우리당(과거 민주당계 정당) 의원은 미국에서 정규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해 국내 언론에 이른바 '학위남발 학교'의 단골 사례로 등장하는 미국 퍼시픽웨스턴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해 '학력 뻥튀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가짜박사 사건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변명과 주장을 펼친다. 가짜박사란 사실이 들통 나면 처음에는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어 언론에 의해 속속 밝혀지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내가 피해자’라고 희생자인 척, 순진한 척 코스프레를 한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나는 이러이러한 능력을 갖췄으니까 학력 위조쯤은 해도 무방하다'는 심리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로 거짓말을 덮는 연쇄 작용에 의해 결국에는 가책마저 상실하게 된다"며 "학력·경력 위조는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종국엔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산수연서 화려한 졸업식 가운과 모자를 쓰고 뽐냈던 노인 단체 회장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박사학위는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단지 학위를 수여한 대학의 내부적 문제와 논문 심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을 뿐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 

이 노인 단체 회장이 최근에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리는 행동을 해 노인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전국의 노인 회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논문집을 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인 단체 회장의 가짜박사 소동에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일생에 한 번 뿐인 소중한 산수연을 꼭 그렇게 ‘허영과 기만으로 가득 찬 쇼장’으로 만들어야만 했나 이다. 

윤태만 전 대한노인회 대구 달성군지회장은 2019년 10월 19일 팔순을 맞아 사비를 들여 복지관 노인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산수연을 대신했다. 

노인이 존경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