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깜빡 깜빡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깜빡 깜빡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3.10.10 10:31
  • 호수 8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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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카디건 챙겼는데 웬 반팔셔츠가…

상처 안난 손가락에 반창고 부착

실수 연발에 치매 검사까지 받아

깜박 깜박하는 건 나이 먹은 증거

“좀 헐렁하면 어때” 마음 다독여

최고로 더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서둘러 외출준비를 했다. 바깥 날씨는 무더워도 카페 안에는 에어컨이 세게 나오니, 그럴 때 걸칠 카디건이 필요했다. 긴소매 회색 얇은 카디건을 집어 급히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예상대로 카페 안은 추워서 오들오들 떨 지경이었다. 겉옷을 가져오길 잘했다.

가방 속에서 카디건을 꺼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외출복 카디건을 가져온다는 게 그만  집에서 입다가 벗어놓은 회색 반팔 티셔츠를 집어 들고 나온 것이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어디로 숨고 싶었다. 그래도 추우니 어쩌겠는가. 어깨 위로 티셔츠를 어정쩡 걸쳤다.

왼쪽 검지 끝에 어디서 베었는지 작은 상처가 났다. 빨리 아물라고 반창고를 단단히 붙였다.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다 보니 반창고가 물에 젖고 헐렁해졌다. 새것으로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떼어낸 후, 반나절을 잊고 지냈다. 

문득 생각이 나 다시 반창고를 붙였다. 일과가 끝나고 조용한 시간이 되어 무심히 상처 난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아뿔싸! 상처는 두 번째 손가락에 났는데 반창고는 엄지손가락에 떡하니 감겨 있었다.

밥을 지으려고 압력밥솥을 열었다. 어머나! 내솥에 밥풀이 잔뜩 붙어있다. 전날 밥을 해 먹고는 설거지를 하지도 않고 그대로 뒀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정말 살다 살다 처음이다.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보건소에 가서 치매 검사도 마쳤다. 조금 긴장했지만 계산 문제도 잘 풀었고,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잘 말했고, ‘민수는 11시에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습니다’라는 문장을 한 번 듣고 외워서 그대로 말해 너끈히 합격 점수도 받았다. 그쪽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이렇게 헐렁해진 나 스스로에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조금 풀어져도 괜찮아. 책임감에 가득 차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내가 이제 여유가 생겼다는 뜻 아닌가. 

매사 정확하려고 했고, 모든 일정대로 꼼꼼하게 수행하려고 전전긍긍하던 내가 이제 느슨해지고 긴장을 풀고 살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뭐 그리 급할 것도, 쫓길 것도 없지 않은가. 젊고 바쁠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가고 싶은 모임에만 나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이웃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의 이런 이야기를 고백했더니, 저마다 한 가지씩 어처구니없었던 사건을 펼쳐 놓는다.

어떤 여성은 등이 결려 파스를 붙이려는데, 집에 붙여줄 사람이 없어 거울로 뒤를 돌아보고 혼자 파스를 붙였다. 성공했다. 돌아보니, 파스가 거울에 붙어있더라고 한다. 어떤 이는 동생과 한참 전화 통화를 하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나, 나 핸드폰 어디 두었는지 안 보인다’. 그러자 상대편에 있던 여성이 말했다. ‘어머, 언니, 얼른 전화 끊고, 잘 찾아 봐. 그럼 안녕’ 

우리 부부의 초대로 이웃 내외와 함께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했다. 3시간을 집중해서 보고, 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애프터 티타임도 하며 영화 본 감동을 실컷 나누었다. 한 달쯤 지나 그 이웃 내외와 만났다. 여러 가지 영화 얘기 끝에 그 댁 남편이 말했다. “참, 영화 ‘오펜하이머’ 봤어요? 정말 괜찮아요. 꼭 보세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악 얼어버렸다. 그의 아내가 당황하며 남편의 입을 막으려 했다. 마치 엄앵란, 신성일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두 손을 주먹 쥐어 다듬이질하듯 남편을 방망이질했다. “아니 이 이가! 이 댁 초대로 같이 영화를 보아 놓고선!” 

예전엔 ‘말도 안 돼’ 하며 웃었지만, 이제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웃는다. 우리가 깜빡깜빡 하는 건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슬프거나 우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보아줄 만, 들어줄 만, 감수할 만한, 우리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귀여운 변화이니 말이다. 너무 세상이 팍팍한 것 같아 살신성소(殺身成笑: 자신을 낮춰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를 한 번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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