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3] 그토록 하늘빛이 맑은 날이면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3] 그토록 하늘빛이 맑은 날이면
  •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 승인 2023.10.16 09:30
  • 호수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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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하늘빛이 맑은 날이면

헛된 생각이 내달릴 때 한 점 구름 없는 하늘빛을 우러러 바라보면 그 많던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지니 바른 기운이 들기 때문이다. 정신이 맑을 때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바위 하나, 냇물 한 줄기, 새 한 마리, 물고기 하나를 가만히 살펴보면 가슴속에 안개와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흐뭇이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다 내 무엇을 깨달았던가 다시   헤아려보노라면 도리어, 아득해지는 것이다.

妄想走作時, 仰看無雲之天色, 百慮一掃, 以其正氣故也. 

망상주작시, 앙간무운지천색,  백려일소, 이기정기고야.

且精神好時, 一花一草一石一水一禽一魚靜觀, 則胷中烟勃雲蓊, 若有欣然自得者. 

차정신호시, 일화일초일석일수일금일어정관,즉흉중연발운옹, 약유흔연자득자. 

復理會自得處, 則却茫然矣.

부리회자득처, 즉각망연의.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49권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2」


하늘은 맑고 바람이 일어 구름의 자리도 흔하지 않다. 아득히 멀던 산이 미간에 육박하고 모든 나무의 모든 이파리들이 이파리로서의 존재감을 반짝반짝 드러낸다. 앞뜰 작은 나무 또한 제 몸을 한껏 부풀린다. 이파리와 이파리, 가지와 가지들이 마치 한 나무 사이가 아니라는 양 틈을 벌리면 바람 두어 줄기, 참새 서너 마리, 햇볕 몇 줌 같은 것들이 기꺼이 갈마들며 깃든다. 그러한 날 저물녘이면 먼 산 나무가 일찍 잠들려는지 제 우듬지에 이불을 덮는 부스럭거림조차 들을 수 있다. 먼 것이 가까워지고 좁은 것이 넓어지는, 그런 하루가 드물지만 때때로 있다.

젊은 시절의 이덕무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펼쳐진 하늘과 그것이 품고 있는 사물이나 풍경들을 귀와 눈, 입과 마음으로 감각하고 기록하였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푸른 하늘의 한 조각 흰 구름[靑天中一片純白之雲, 分明是李烱菴知心]이라던 형암은 일 없는 낮이면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었고[晝無事, 觀天白, 夜無事, 闔眼. 觀天白, 心坦然, 闔眼, 心怡然], 가을 물낯에 거꾸러져 비치는 하늘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만나는 순간의 아득히 넓고 그윽이 깊은 그리하여 언어로는 옮길 수 없는 경지를 알았다[秋水虛映空, 忽天與靈逢, 中之包空蕩蕩, 其趣也灝邃不可言, 亦無可以言聞].

2010년 5월 26일은 세상의 빛깔이 평소와 크게 달랐다. 나는 까닭 없이 가슴이 잘게 뛰어 온종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서야 그날이 13년만에 서울의 가시거리가 가장 긴 날이었음을 알았다. 그런 하루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토록 하늘빛이 맑은 날이면 문헌이나 사유에 기대지 않고도 어떤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다.(하략)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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