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우리가 비문에 남겨야 할 말 / 이호선
[백세시대 금요칼럼] 우리가 비문에 남겨야 할 말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
  • 승인 2023.10.23 11:23
  • 호수 8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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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

비록 왕도 유명인도 아니지만

평범한 나도 내 가족에게는

스토리가 있는 역사일 것

짧지만 굵은 의미 지닌 명언처럼

남기고픈 한마디 살아서 써보자

해 저문 소양강에 노 젓는 뱃사공. 소양강 처녀는 간데없고 케이블카가 오가는 춘천 소양강을 바라보자면, 그 오랜 노래가 다른 노래와 뒤범벅이 되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무언가 사연이 많을 것 같은 노랫말은 반야월 선생이 쓴 것이고, 이호 선생의 곡조마저 심금을 울린다. 인어의 전설처럼 애처로움이 있을 듯하지만, 의암댐 근처에 쓸쓸히 서 있는 소양강 처녀상은 별다른 사연 없이 서 있다. 

소양강 처녀라는 노래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는 그 여인이 왜 거기 있는지, 혹시 사랑에 신음하다 운명을 던졌는지, 아니면 인어가 사람이 된 것인지, 영문을 모른채 그 옆을 빠른 속도로 운전해 지나갈 것이다. 

소양호를 바라보는 동상의 표정과 흩날리는 옷깃, 그리고 어딘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 꼭 다문 입, 채 닿지 못한 무엇인가를 향한 손가락은 간절함이 가득해 보이지만, 글자 몇 개 없이 노랫말로만 적어놓은 빈약한 스토리가 못내 아쉽다. 전설이 없다지만, 상상마저 빈곤한 것인가.

사람도 ‘소양강 처녀’ 동상 같아서, 장구한 세월 속에 이름이 회자되고 동상으로 남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야사로도 남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도 누구나 ‘살아있는 인간문서’ 아니겠는가. 

굵고 짧은 인생을 사는 이가 있다면, 가늘고 긴 삶을 사는 이도 있을 것이나, 기억은 휘발되고 기록은 남는 것! 글로 써 출판이 되면 좋으련만 남들이 읽는 글을 쓰는 이는 드물고, 심지어 나의 기록을 남긴들 자손들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골칫거리가 된다. 

필자와 상담을 했던 이들 중에는 부모가 남긴 일기장, 기록물, 메모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버리자니 못내 송구하고, 남기자니 누구도 읽지 않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팔리지 않는 골동품’이 되니 말이다. 

태우거나 말거나 자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긴 하나 권하기는 여러분이 유언장을 쓸 때는 떠나고 남을 각종 물건들에 대한 처리를 꼭 적어주기를 바란다. 재산 정리에만 열중하나, 기쁨의 산물이 되는 유산보다는 애틋함의 유품인 손때 묻은 부모의 소소한 물건들을 어찌 처리할지도 꼭 한 자 적어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꼭 하나 남기고 보존할 것도 전하기 바란다. 바로 비문이다. 세월이 지나 우리가 땅에 누워 비석이 서건, 화장 끝에 납골당에 가건, 자연장으로 돌패 하나로 남건 분명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이다. 

장례 상조가 다 알아서 해주는 세상이라 가족은 슬픔만 감당하면 된다지만 정작 남은 가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그 비석 위에, 납골당에, 그리고 돌패 위에 덜렁 부모의 이름 석 자와 사망 날짜만 올라 있는 것에 대한 묘한 감정이다. 

생전에 남긴 말씀, 평소의 말씀이라도 있으면 기억을 짜내어 적으련만, 아무 내용 없이 이름 석 자만 올리는 비석은 우리에게나 자식들에게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 세상에 스토리 없는 이 없고, 역사 속에 없던 이 없다. 세종대왕, 정약용, 전봉준, 전태일, 심지어 소양강 처녀도 그들의 삶이나 사연을 남겼다. 우리가 왕이겠는가, 유명인이겠는가, 거대한 역사의 방향을 틀어낸 이겠는가. 물론 아니다. 변변치 않은 태몽으로 시작해 남다른 총명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청년기나 중년기나 그냥 무탈하게 지낸 소시민이었고, 나이 들어가는 지금도 달리 뾰족한 면은 없다. 

그러나 내 가족에게는 나는 역사이다. 생활역사이고, 감정역사이고, 유전자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좋았건 나빴건 우리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기억에 어떤 유명인보다 각인돼 있는 이들이다. 

우리에 대한 평가가 그들의 손에 있을 수 있으나, 그들에게는 나름 특별한 역사였던 우리가 자손들에게 줄 마지막 선물이 바로 비문일 것이다. 남기고 싶은 바로 그 말, 돌로 새겨지고 그들의 가슴에 새겨질 바로 그 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정리해줄 바로 그 말을 남기자.

동상이나 흉상은커녕 빛바랜 사진, 오래된 영상 속에만 남아있을 우리지만, 우리가 역사였고 좋은 역사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짧지만 응집된 시처럼, 짧지만 굵직한 명언처럼 비문에 우리를 새기자. 그 글을 준비하고 그 문구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더 좋은 삶을 만들고 더 괜찮은 가족이 되고 더 우아한 어른이 될 것이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우리의 삶의 동상을 생각하며 남기고픈 역사 문구를 써보자. 살아서 쓰는 우리의 비문을 시작해보자. 죽음과 미래, 그리고 가족 앞에 가장 멋진 삶과 문장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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