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4] 통제사의 적벽 선유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4] 통제사의 적벽 선유
  •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 승인 2023.10.30 09:25
  • 호수 8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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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의 적벽 선유

동파선 놀던 임술년 가을을 다시 맞이하여

풍악 울리며 배 가는 대로 맡기네.

바다 하늘 보니 달이 더욱 밝고

통제사의 검기로 시 지어 보네.

이제야 밝은 해가 누각을 둘러싸고

새삼 미풍이 타루에 불어오는 걸 알겠네.

천하 뭇 생명들이 말갛게 익기를 생각하니

어디에 가야 눈썹에 시름이 없어질까.

蘇仙壬戌重逢秋 (소선임술중봉추)

簫鼓中流任去留 (소고중류임거류)

滄海天光多月夜 (창해천광다월야)

元戎劍氣作詩遊 (원융검기작시유)

始知爀日圍官閣 (시지혁일위관각)

轉覺微風拂舵樓 (전각미풍불타루)

大地群生思濯熟 (대지군생사탁숙)

眉頭何處可無愁 (미두하처가무수)

- 신헌(申櫶, 1810~1884), 『위당집(葳堂集)』〈임술년 7월 16일 공주도에서 뱃놀이하다.       [壬戌秋七月旣望舟遊拱珠島]〉


위당(葳堂) 신헌(申櫶, 1810~1888)은 19세기 순조와 대원군집권기에 활약한 문무겸전의 관료였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국빈(國賓), 초명은 관호(觀浩)이다.(중략)

그의 집안은 문반 가문이었다가 5대조 신한장(申漢章)이 무과에 급제한 이래로 증조부 신대준(申大儁)부터 무반가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신헌도 삼도수군통제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병조판서 등 군사관련 고위직을 역임하였던 무인이지만 문인으로서도 상당한 명성이 있었다. 13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신헌은 전라우수사 시절 제주도에서 유배살이 하던 김정희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서예와 금석학, 시학에 대하여 문의하였고, 다산 정약용의 문하를 통해 정약용을 사숙하였다. (중략)

수련에서는 소식이 적벽 선유를 즐겼던 해와 날짜가 돌아왔음을 기념하여 피리 불고 장구치며 성대하고 흥겹게 벌이는 모습을 읊었다. 함련은 통제영 앞바다에서 즐기는 뱃놀이의 특별함을 잘 나타내었다. 사방이 탁 트인 바다에서 바라본 달빛은 더욱 밝고, 통제사와 그 휘하 우후들의 시 짓기는 검기를 연상할 정도로 호기롭고 서릿발 같은 기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련의 爀日과 微風은 모두 임금의 은택을 뜻한다.(중략) 하지만 미련에서는 이러한 즐거움 속에서도 근심을 풀지 못하는 면모를 보이며 끝맺는다.

가을이 되어 천하 만물들이 풍요로워지는 가운데, 신헌은 어째서 저렇게 근심했을까. 그것은 같은 해 있었던 임술 민란 때문일 것이다. 비록 『승정원일기』에 신헌이 임술 민란에 대한 구제책을 아뢴 내용은 없지만, 그의 벗 박규수가 경상도 안핵사로 제수되어 진주 민란의 원인이 전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장계로 올린 점 등을 통해 그 폐해와 대책 마련에 깊이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헌은 적벽 선유를 통해 임술 민란이 가져다 준 어수선한 시세를 잠시나마 잊으려고 하였던 것이다.(하략)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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